대학로 안창호선생 흉상(흥사단본부)

8코스 배움의 길
세상을 바꾸는 교육과 연구의 공간, '싱크 탱크' 종로

(안내) 한국사 강사 최태성
(배역) 김학수(고종 때 문신, 성균관대사성)

흉상의 주인공은 안창호라는 분이오. 내 언뜻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오. 미국으로 이민 간 젊은 부부, 안창호와 이혜련 부부. 그 후 오랫동안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이렇게 여기에서 그의 흉상을 만나게 되었소.

비록 나보다 한참 후배지만,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하는 사이이니 선생으로 부르겠소. 안창호 선생은 민권운동과 독립운동에 앞장선 인물이오. 평양에서 자라며 18살 예민한 시기에 청일전쟁을 겪으며 힘없는 나라의 현실을 깨달았다고 하오.

청일전쟁이라, 참으로 안타까운 전쟁이었소. 남의 나라 전쟁이 우리 땅에서 일어났는데 이를 막지 못한 조선의 무력함이라니. 젊은 안창호 선생에게 미안할 따름이오. 이후 안창호 선생은 서울에서 신학문을 배우면서 나라의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하오. 그래서 나라 안에 있을 때는 독립협회와 신민회에서 자주를 위해 헌신했으며 나라 밖에 가서는 대한인국민회,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같은 독립운동 기관에서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으니, 감히 내가 쉽게 평가할 수 없는 거인이라고 할 수 있겠소.

그럼 안창호 선생의 행적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소.

미국으로 떠난 안창호 선생은 항상 조국을 마음에 두고 있었소. 무엇보다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나라, 그리고 국권을 빼앗긴 나라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걸기로 한 것이오. 이를 위해 중국과 연해주, 미국과 멕시코, 필리핀을 다니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으니, 독립에 나선 인사 가운데 가장 많은 길을 간 인물이 아닐까 하오.

안창호 선생에게 장기가 하나 있었으니 동포를 하나로 모으는 것이었소. 1907년, 국내에서는 비밀 결사인 신민회를 만들어 자주와 독립을 위해 일했다면, 미국으로 가서는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우리 동포를 하나로 모았소. 또 여러 곳에 임시정부가 들어서자 이를 하나의 임시정부로 통합하는 일에 앞장섰소.

당시 여러 사람은 모두 자기만의 뜻이 있었을 테지만 논리정연하고 당당한 안창호 선생의 영도 아래 하나가 될 수 있었을 것이오. 아마도 그의 논리의 바탕에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뚜렷한 방략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오.

교육을 통해 인재를 길러 나라의 미래를 밝히고자 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오. 평양에 있을 때는 대성학교를 세우고 출판사인 태극서관을 운영했고, 나라 밖에서는 민족 운동의 간부를 기르기 위해 미국에 본부를 둔 흥사단을 만들었소. 특히 흥사단은 대성학교와 태극서관, 신민회가 하던 일을 계승하려는 의지가 강했다는 점에서, 청년을 기르고 미래를 준비하는 안창호 선생의 장기가 잘 발휘된 기관이라고 할 수 있소.

나 역시 교육에 힘을 기울였지만, 안창호 선생처럼 큰 그림을 그려 성균관에서 생도들을 교육하지는 못했소. 언젠가는 성균관을 새롭게 만들어줄 당당하면서도 현명한 선비가 나타나리라 믿고 있소.

이후 국내에서는 흥사단의 지부로 서울의 수양동맹회와 평양의 동우구락부가 합법적으로 만들어졌소. 그리고 두 단체는 수양동우회를 거쳐 동우회로 통합되었소. 하지만 이를 가만 둘 일본이 아니오. 결국 ‘동우회 사건’을 일으켜 많은 지도자를 구속하고 동우회를 해산했소. 이 과정에서 국외에 있던 안창호 선생 역시 구속과 석방, 그리고 다시 구속과 석방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소. 우리 역사의 큰 인물이 세상을 떠났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오.

안창호 선생은 늘 단정한 복장을 한 것으로 유명하오. 외국에서 한국인이 무시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뜻, 독립운동에 나선 사람의 굳은 마음을 겉으로 표시한 것이라고 하오.

안창호 선생 동상 뒤에 있는 건물이 흥사단 본부라오. 미국에서 설립되었던 흥사단은 광복 이후 국내로 본부를 옮겨 지금까지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소. 안창호 선생은 90여 년 전 세상을 떠났으나 선생이 18세에 세운 ‘실력을 키워 나라를 지킨다’라는 뜻은 흥사단을 통해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오.

자, 선생의 흉상을 뒤로 하고 마로니에 공원으로 가겠소. 넓진 않으나 크고 작은 나무가 아늑한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이 바로 마로니에 공원이오. 공원을 가로질러 붉은색 벽돌의 ‘아르코 미술관’으로 가면 그 앞에 자리하고 있는 수령이 100살 정도가 되는 마로니에 나무를 만날 수 있소.

이 마로니에 나무가 있어서 여기를 마로니에 공원이라 부른 것인데, 사실 이 나무는 공원에 심은 것이 아니라 대학교, 그러니까 옛날에 여기에 있던 서울대학교에 심은 것이었소. 그러한 이유로 주변 동네는 대학로라 불렸고 1975년 서울대학교가 이사 간 후 학교 터에 공원이 들어서면서 ‘마로니에 공원’이라 불리게 된 것이오. 마로니에 나무 옆에는 이곳에 서울대학교가 있던 곳임을 알려주는 ‘서울대학교 유지기념비’가 서 있소.

서울대학교 본관 건물만은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그 건물이 바로 옆에 있는 건물, 지금의 ‘예술가의 집’이오.

@등록기관 : 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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