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코스 혁명의 길
종로에서 만나는 새로운 세상을 위한 움직임, 혁명의 길 이야기

(안내) 방송인 정재환
(배역) 박승필(영화제작자, 광무대/단성사 대표)

여기는 구 조선중앙일보 사옥입니다. 지금은 금융기관이 사무실로 쓰고 있으니 바깥에서 살펴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인도가 넓지는 않지만, 재주껏 편안한 공간을 찾아서 제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 건물은 몇 번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1926년, 처음 지었을 때는 조선일보 사옥이었습니다. 1920년, 일본은 3.1운동을 겪은 뒤, 이른바 ‘문화통치’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우리 민족이 언론사를 설립할 수 있도록 허가한 것입니다. 언론사 설립을 위해 허가를 받아야 한다니, 참 고약한 세상이었습니다.

이때 생겨난 언론사 가운데 하나인 조선일보는 당대 민족운동 지도자를 사장으로 초빙하며 많은 활동을 벌였습니다. 주요 경영진은 제가 존경하는 분들인데요, 이상재 선생을 비롯해, 신석우 선생, 안재홍 선생을 대표로 꼽을 수 있습니다.

신석우 선생은 1924년, 조선일보가 정간을 당한 뒤 경영에 어려움을 겪자 신문사를 인수하여 이상재 선생을 사장으로 초빙하면서 혁신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으로 유명합니다. 1927년, 좌우합작 운동으로 신간회가 조직됐을 때, 조선일보는 신간회 본부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신석우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울 때, 임시정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는 데 역할을 했습니다. 여러 독립운동가가 국호를 놓고 고민할 때, 신석우 선생이 ‘빼앗긴 나라가 대한이니, 찾을 나라도 대한으로 하자.’고 주장한 것입니다.

조선일보가 6년 동안 머물렀던 이 건물에 다시 들어온 회사 역시 신문사였습니다. 바로 조선중앙일보입니다. 조선중앙일보는 중외일보, 중앙일보의 계보를 잇는 신문입니다. 1933년, 여운형 선생이 사장에 취임하며 신문 이름에 ‘조선’을 더해 조선중앙일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요, 길의 주제가 혁명의 길인데 신문사에 관한 얘기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언론사로서 혁명적인 발상을 했다고 할까요? 바로 베를린 올림픽에 마라톤 선수로 출전한 손기정 선수의 시상식 사진에서 가슴에 있던 일장기를 지운 일이 여기에서 일어난 겁니다.

이 사건은 알면 알수록 감동을 줍니다. 1935년, 올림픽 마라톤 일본 대표를 선발하는 대회에서 손기정 선수가 2시간 26분의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남승룡 선수와 함께 선발된 일, 1936년, 독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29분의 기록을 세우며 우승을 한 일은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손기정 선수의 우승 소식이 전해졌을 때, 우리 민족은 가슴 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자신감을 깨울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손기정 선수는 자신이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라는 것을 선수 사인을 통해 당당히 드러냈습니다. 국적은 코리아, 이름은 한글로 손기정이라고 적은 것입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일입니까?

이처럼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고 할 손기정 선수의 활약에서 유일하게 안타까운 부분이 바로 유니폼의 일장기였습니다. 그런데요, 이 소식을 보도한 신문사 가운데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가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실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이 문제가 되어 동아일보는 영업중지인 정간을 당했고요, 조선중앙일보는 정간을 피할 목적으로 자진해서 휴간했습니다.

당시 자본금이 넉넉하지 않았던 조선중앙일보는 이 사건의 여파로 다시 신문을 발행하지 못하게 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어떤 일이 닥칠지 충분히 짐작했을 텐데요, 과감히 일장기를 삭제한 것은 분명 우리 언론이 만들어낸 혁명적 사건 중 하나였습니다.

이제 다음 장소로 가겠습니다. 우정총국입니다. 이곳에서 차도를 건너 북쪽으로 걸어가면 됩니다. 조계사 바로 옆이니까, 쉽게 찾을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