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 장군 동상


7코스 혁명의 길
종로에서 만나는 새로운 세상을 위한 움직임, 혁명의 길 이야기

(안내) 방송인 정재환
(배역) 박승필(영화제작자, 광무대/단성사 대표)

녹두장군 앞에 섰습니다. 비록 조각이긴 하지만 전봉준 장군의 형형한 눈빛을 보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백성과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고 여기며 동학농민운동, 동학혁명을 일으켰지만, 끝내 재판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심정이 어땠을까 궁금합니다. 게다가 재판 담당자가 자신이 몰아내려고 했던 권신과 일본인이었으니, 더더욱 참담했을 겁니다. 그러나 전봉준 장군은 당당함을 지켰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관군이나 일본군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지 않고, 재판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는 점은 우리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재판 기록을 보면, 전봉준 장군은 조병갑의 횡포, 민씨 척족의 전횡, 일본군과 간신을 몰아내고 개혁을 하려고 했다고 밝혔습니다. 동학농민운동 최고 지도자의 입을 통해 그 사건을 들을 수 있었던 겁니다. 재판도 없이 전봉준 장군이 죽음을 맞이했다면 조선 정부, 혹은 일본이 꾸며낸 이야기 안에 담긴 진실을 찾아내야 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을 것입니다.

자, 이제 동상을 찬찬히 들여다보시죠. 보통 동상이라면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으로 만듭니다. 그런데요, 전봉준 장군의 동상은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전봉준 장군의 재판 상황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동상의 바탕은 전봉준 장군의 사진입니다. 가마에 탄 전봉준 장군이 어디론가 이동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것입니다. 당시 전봉준 장군은 체포와 심문 과정에서 부상이 심해져서 걸을 수 없었습니다. 중구 을지로에 있던 일본영사관에서 법무아문이 설치한 임시재판소, 혹은 감옥이 있는 전옥서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곧 양쪽에서 심문을 받았고, 지금 동상 근처가 바로 전옥서 터입니다.

일본의 사진기자로 서울에 온 무라카미 텐신이 일본영사관 측의 양해를 구한 뒤 이동 중인 전봉준 장군에게 다가가 사진을 찍으려 했습니다. 이를 본 전봉준 장군은 자신을 가리고 있던 큰 양산을 치우게 하고 정면을 응시하며 적극적으로 촬영에 임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 우리가 전봉준 장군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사진에 담긴 것입니다.

여기서 전봉준 장군이 일본 사진사에게, 그것도 피폐한 모습임에도 촬영에 응했던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제가 영화 제작에 참여한 덕분에 카메라 앞에 선 사람의 마음을 대략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눈으로 자신의 뜻을 보여주는데, 전봉준 장군은 의연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자신이 정정당당한 일을 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1895년 3월 29일,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같이 혁명의 전선에 나선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성두한 네 분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어차피 정해진 결과였습니다만, 갑오개혁 직후 개정된 법에 따라 참수형이 아닌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전봉준 장군에게는 사진을 찍는 것도, 그리고 재판에 임해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것도 혁명의 길이었던 것 같습니다.

자, 이제 다음 장소로 가겠습니다. 다음은 길 건너에 있는 종각입니다.

@등록기관 : 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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