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각


7코스 혁명의 길
종로에서 만나는 새로운 세상을 위한 움직임, 혁명의 길 이야기

(안내) 방송인 정재환
(배역) 박승필(영화제작자, 광무대/단성사 대표)

종각입니다. 종로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비록 위치로 볼 때는 종로구의 중심은 아닐지라도 의미로 본다면, 종로를 대표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종각이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던 것은 아니고 도로확장 등의 이유로 여러번 옮겨져 현재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보통 때는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곳이기도 하지만, 새해를 맞이하는 행사에 수많은 인파가 참여하는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종각에서 한 해를 마감하고 한 해를 맞는 느낌이 남다르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새롭게 시작한 한 해는 시간이 흐르면 어느 순간 묵은해가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새해를 기다리며 다시 이곳에 설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걷고 있는 혁명의 길도 비슷할 것 같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설령 그것이 실현되더라도 세상은 또 변화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오랫동안 힘들여 이룬 전진을 뒤로 돌려버리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많은 사람의 희생을 요구하는 혁명이 아닌 합의를 통해 개선해 나아가는 것, 그리고 이런 개혁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런데요, 종각 앞, 이 공간이 바로 그런 논의가 펼쳐졌던 곳입니다.

종로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많습니다. 시전도 있고, 한양, 서울의 중심으로 이동하려면 이 길을 지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로의 별명이 있으니 바로 운종가입니다. 사람이 구름처럼 모이는 길이란 뜻입니다. 그 운종가의 중심이 바로 종각이었습니다.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한양의 도로 모양은 지금과 달랐습니다. 흥인지문에서 광화문으로 가는 길은 지금과 같지만, 광화문에서 숭례문으로 가려면 종각까지 와서 숭례문으로 난 길을 가야 했습니다.

도읍지를 한양으로 정한 조선은 도성을 쌓고, 네 개의 문을 설치한 다음 유교의 덕목과 관련이 있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숙정문의 ‘정’ 자가 지혜로울 ‘지’ 자와 통한다고 보고, 사대문 이름에 ‘인의예지’를 넣은 것입니다. 그리고 고종 때 종각에 보신각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한양에는 ‘인의예지신’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모두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서울의 중심이며,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인 종각 앞에 1898년에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바로 만민공동회였습니다. 독립협회가 주최한 민중대회로 만 명이 넘는 사람이 종로에 모여 정치적 의사를 표현했습니다. 이름 그대로 만민이 모인 회의였습니다. 만민공동회가 처음 다룬 안건은 러시아의 이권 침탈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회를 거듭하며 만민공동회의 의제는 다양해졌습니다.

서재필 출국 반대, 무관학교 학생 선발 부정 문제 해결, 의병에게 피살된 일본인 배상금 요구에 대한 반대 등 당시 국내외의 문제를 두고 여러 사람이 거침없이 의견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정치적 견해를 밝히려면 상소를 올려야 했으니 글을 아는 양반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만민공동회에서는 말로 자신의 의견을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참여했던 겁니다. 다시 말해 종로가 그리스의 아고라 같은 정치 토론의 장이 된 것입니다.

만민공동회의 활동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박정양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적인 내각을 구성하도록 했고, 이들과 함께 의회 설립을 계획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시기에는 관료와 함께 했다고 해서 관민공동회로 부르기도 합니다. 당시 정부 대표인 박정양의 뒤를 이어 발언을 한 사람이 백정 박성춘입니다. 박성춘은 연설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을 장대로, 나라를 천막으로 비유한 다음, 자신은 하나의 장대이지만 장대가 여럿 모인다면 천막을 튼튼하게 받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논리에도 맞고 뜻도 좋은 이 말에 많은 사람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습니다.

천대받던 백정까지 나라의 일, 정치에 참여한 관민공동회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일입니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이 내용을 담은 영화를 만들어야겠습니다.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은 의사가 되었고, 독립운동을 지원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민중의 뜨거운 열망은 놀랍게도 의회 설립에 대한 방법까지 토론을 통해 정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에 대해 위정자들은 자신의 권력이 위협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종과 보수관료들의 공격에 관리들이 물러나면서 관민공동회는 백성들이 주축이 된 만민공동회로 바뀌었습니다.

고종과 보수 관료들은 만민공동회를 공격하기도, 회유하기도 하다가 끝내 만민공동회를 해산시켰습니다. 이후 대한제국은 황제권 강화로 나아갔지만, 그 결과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국권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만민공동회의 도전은 실패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때 뜨거운 열기를 경험한 사람들이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으로, 그리고 1919년 삼일운동으로,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포함한 독립운동으로 뻗어나간 것을 생각하면, 역시 역사는 당대의 결과로만 성공과 실패를 쉽게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개인도 종종 실패할 때가 있지만, 실패의 경험을 거울로 삼아 더 큰 성공을 거두기도 합니다. 만일 실패가 두렵다거나 게을러서 도전조차 하지 않는다면, 어떤 경험도 활용할 수 없으니 결코 작은 성공조차 이루기 어려울 것입니다.

박정양과 박성춘의 열정이 담긴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한 것 같습니다. 이제 혁명의 길, 마지막 장소로 가겠습니다. 그 곳은 바로 제가 일하던 단성사 앞입니다.

자, 조금만 더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혁명은 뜨거운 열정을 필요로 합니다. 하하하.

@등록기관 : 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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