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희 선생 집터


6코스 3.1운동 길
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민주주의의 시작 3.1운동 이야기

(안내) 배우 박형준
(배역) 송계백(일본의 유학생 독립운동을 국내에 전한 대학생)

여기는 손병희 선생 집터입니다. 작은 표석 하나뿐이지만, 역사 속 의미는 만만치 않은 공간입니다.

바로 3.1운동의 중심인물 손병희 선생을 기억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 소식이 여러 사람을 거쳐 최종 도착한 곳은 바로 손병희 선생이었습니다. 손병희 선생의 결단에 따라서 독립운동은 결정되었고, 기독교와 불교가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천도교의 최고 책임자라는 무거운 책임감이 반영되었을 겁니다. 물론 당시 천도교의 대도주는 박인호 선생이었지만 누구나 천도교의 중심에는 손병희 선생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결단을 내리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을 겁니다. 천도교의 전신인 동학이 2차 봉기에 나설 때, 손병희 선생은 책임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척양척왜! 서양과 왜적을 물리친다는 기치를 높이 세우고 일으킨 동학혁명이지만 처절한 희생을 겪었습니다. 그 후에는 동학의 이름으로 퍼져나간 친일파를 몰아내고, 천도교로 이름을 바꾸면서 교세 확장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당시 기독교 전체보다도 훨씬 큰 교세를 갖게 되었지만, 일제에 맞선다는 것은 여전히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3.1운동을 결행하면서 독립운동 자금도, 독립선언서 인쇄도 천도교가 맡았습니다. 천도교와 깊은 관련이 있는 인사들이 민족대표가 되었고, 손병희 선생은 독립선언서 맨 앞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물론 탑골공원에 나가지 않기로 한 결정은 아쉬운 일로 평가받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다 잘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일만을 꼬집어 비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3.1 독립운동은 민족지사들이 불을 붙였지만, 또 다른 동력에 의해 들불처럼 번진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곰곰 생각해 보면 3.1운동에는 그것을 준비한 사람들, 그것을 실행한 사람들, 그것을 퍼뜨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세기가 지난 오늘 이 순간에도 3.1운동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우리’가 있습니다.

아, 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이 궁금해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독립운동, 곧 시위의 방법입니다. 구호는 ‘조선 독립 만세’ 또는 ‘대한 독립 만세’입니다. 조선과 대한, 그리고 독립은 쉽게 이해가 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세는 축하할 때 쓰는 말입니다. 이 구호를 누가 정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3.1운동을 만세운동이라 불렀고 시위의 모습도 대체로 비슷했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이심전심 ‘조선이, 대한이 독립하면 만세다!’ 그런 마음이었겠지요?

이제 다음 장소로 옮겨 가겠습니다. 3.1대로의 중심, 그리고 경운동에 있는 천도교 중앙대교당입니다. 멀리서 보아도 금방 눈에 띄는 독특한 건물입니다. 붉은 벽돌로 된 이국풍의 교당이라서 쉽게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등록기관 : 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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