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델 집터


3코스 이방인의 은행나무 길
근대 우리나라에 살았던 외국인 이야기

(안내) 성우 김보민
(배역) 메리 린리테일러(딜쿠샤의 주인/남편 알버트테일러)

자, 표석을 찾으셨나요. 맞습니다. 이곳은 저와 같은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의 집이 있던 곳입니다. 아쉽게도 제가 베델을 만난 적은 없습니다. 제가 오기 훨씬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죠. 많은 한국 사람들은 베델을 고마운 영국인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베델이 창건한 신문 〈대한매일신보〉를 기억하고 있더라고요.

베델은 영국인 기자였는데, 한국에 와서 한글로 된 〈대한매일신보〉 말고도 영어로 된 〈코리아 데일리 메일〉을 발간했어요. 이 신문에 대해 한국인이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된 것은 이유가 있다고 해요. 몇 가지 사건과 관련이 있는데요, 1905년, 을사늑약이라고 하죠?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박탈한 사건이요. 이 사건에 분노한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란 글을 실었는데, 일본이 이를 막아버렸어요. 그런데 그 글의 내용과 일본이 막은 내용을 〈대한매일신보〉에 실은 겁니다.

또 을사늑약은 무효라고 고종이 외국에 보낸 친서 역시 〈대한매일신보〉에 실었죠. 당시 일본은 고종도 이 늑약에 찬성했다고 거짓말을 했는데요, 신문 덕분에 들통이 난 겁니다.

그리고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 때도 앞장섰어요. 일본이 빌려준 차관을 갚아야 독립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죠. 거기에는 신문에 실린 기사, 그리고 의연금을 낸 사람의 이름이 신문에 실린 것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비록 일본의 방해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지만, 수십만 명이 참여한 이 운동 덕분에 전국적으로 독립에 대한 의지가 높아졌다고 합니다.

이처럼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에게 눈엣가시였지만 발행인이 동맹국인 영국 사람, 베델이라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어려운 시절, 〈대한매일신보〉는 한국인이 숨을 쉴 수 있는 통로였지요. 결국 일본은 외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을 통제하기 위해 신문지법을 개정했고요, 주한 영국총영사관에 압력을 넣어 베델에 대한 재판을 열어서 괴롭히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베델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아, 베델이 살았던 집은 한옥이었다고 해요. 외국에서 온 사람 가운데 한옥의 매력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답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만났다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네요. 그래도 이렇게 표석으로나마 베델의 흔적을 만날 수 있어 다행입니다. 자, 이제 베델의 집터에서 아래로 뻗어 내려가는 성곽을 따라 옮겨 갈게요.


@등록기관 : 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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