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필드 기념관(돈의문 박물관 마을)


3코스 이방인의 은행나무 길
근대 우리나라에 살았던 외국인 이야기

(안내) 성우 김보민
(배역) 메리 린리테일러(딜쿠샤의 주인/남편 알버트테일러)

자, 잘 찾아오셨어요. 조그마한 이층집, 조그마한 이 공간이 스코필드 기념관입니다. 이 공간의 주인공인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기도 해요. 영국계 캐나다인인데 말이죠. 저와 달리 스코필드 박사는 한국의 역사 속으로 깊이 들어간 인물이지요. 그래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부를 수 있어요.

저는 남편을 통해 스코필드를 알았습니다.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 알버트가 A.P 통신원이 된 것을 기억하시죠? 남편은 A.P 통신원의 자격으로 스코필드와 함께 3월 5일 남대문에서 있었던 학생들의 대규모 만세 시위를 취재했어요. 그래서 저는 처음에 스코필드도 남편과 같은 통신원인 줄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스코필드는 세브란스 의전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가르치는 교수였어요.
스코필드는 스스로 ‘석호필’이라는 한국 이름을 짓고 의사로, 선교사로 활동했죠. 스코필드가 세브란스 의전의 학생들에게 가르친 것은 의학 지식만이 아니었어요. 지식인으로서 책임과 사회 참여를 독려했죠. 스코필드 자신도 이러한 원칙을 바탕으로 활동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돈독한 신뢰를 얻었다고 해요. 그래서 3.1운동을 기획하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자신들의 활동을 외부에 전할 적임자로 스코필드를 생각했다고 들었어요.

사실 우리 이방인들은 3.1운동을 사전에 알지 못했어요. 그런데 단 한 명, 스코필드만 예외였죠. 전날 그의 집으로 찾아온 세브란스 의전 학생 이용설은, 몸속에 숨겨 온 독립선언서를 스코필드에게 전하며 미국 백악관으로 보내주길 부탁했어요. 그리고 3월 1일 오전 세브란스 의전 직원으로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이갑성은, 그에게 만세 현장을 카메라에 담아 외국에 알려주길 부탁했답니다.

스코필드는 자전거에 카메라를 싣고 탑골공원으로 향했지요. 그렇게 해서 3.1운동 당일의 모습이 스코필드의 사진으로 남게 되었지요.

스코필드의 활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만세운동 현장에서 많은 한국인이 체포되었고, 일본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부상을 입었어요. 스코필드는 현장을 찾아 사실을 파악하고 언론을 통해 일본의 만행을 알렸죠. 유관순을 비롯한 학생들을 만난 서대문 형무소, 수원 제암리와 고주리 학살 현장도 그가 찾은 장소였죠.

일본의 위협 속에서도 스코필드는 항일 활동을 멈추지 않았어요. 스코필드가 영국 언론인이었기에 일본은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하지만 세브란스 의전에 대한 일본의 압박이 심해지고 암살 위기에 처하게 되자 1920년 결국 스코필드는 한국을 떠나게 되었답니다.

스코필드는 낯선 타국에서 부당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행동에 나선 진정한 지식인이며,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한 의사이자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그의 유해는 외국인으로는 드물게 국립 현충원 독립운동가 묘역에 묻혀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을 기념관 안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요, 2층에는 조그마한 테라스가 있어서 잠시 쉬어가기에도 좋습니다. 여기를 다 살펴본 다음 우리가 마지막으로 찾아갈 곳은 한국을 사랑한 또 한 사람의 이방인을 기리는 장소입니다.

세종문화회관 뒤편 주시경 마당으로 옮겨 가겠습니다.

@등록기관 : 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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