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문학관과 시인의 언덕

2코스 독립과 매국의 길
배화여학교 3.1운동 만세시위 중심인물

(안내) 가수 송민경
(배역) 김경화(배화여학교 3.1운동 만세시위 중심인물)

여기는 참 유명한 곳이죠. 문학관인데 건물의 모습이 조금 독특합니다. 윤동주 문학관은 청운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활용해 조성했다고 해요. 거대한 물탱크가 전시 공간으로 바뀌는 모습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문학은 잘 모릅니다만, 수도관을 통해 물을 보내던 이 공간이 사람들에게 문학의 기운을 듬뿍 보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도가압장을 문학관으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윤동주의 시 ‘자화상’에 나오는 우물의 이미지에서 착안했다고 해요.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우리말과 우리 글을 사랑했던 젊은 시인의 작품과 서신, 유품이 전시되어 있어서 윤동주 시인을 잘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윤동주 문학관이 들어서게 된 것은 문학관 바로 위쪽에 있는 시인의 언덕과 관련이 있어요. 윤동주가 서울에서 공부하던 때, 이 일대를 친구들과 거닐고 사색하며 그의 대표작들인 ‘서시’, ‘별 헤는 밤’ 등의 시를 썼다고 하죠.

시인의 언덕에는 정말 아름다운 시, ‘서시’의 시비가 세워져 있어요. 뭐랄까, 이 시를 읽으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안정되는 듯하지만, 또 어디선가 뜨거운 무엇이 솟아나는 것도 같아요. 아, 제 감상이 너무 길어졌나요? 그럼 이 얘기는 어떨까요? 이 시비를 세울 때, 시인의 무덤이 있는 북간도 용정에서 가져온 흙을 이곳에 뿌렸다고 합니다. 그러니 시인의 자취가 남은 또 하나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럼, 잠시 윤동주 시인에 대해 살펴볼까요. 조사하느라 조금 힘은 들었지만 아주 보람찬 시간이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1917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보다 한참 동생이네요. 하하~ 참, 명동촌은 1899년 함경도 이주민들이 건설한 한인 마을로 일찍부터 신학문과 개신교를 받아들인 곳이었는데요, 시인은 거기에 있는 명동학교를 다녔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시를 짓고 많은 책을 읽었던 윤동주가 자신의 재능을 꽃피운 것은 1938년에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면서였죠. 그곳에서 국어학자 최현배의 조선어, 역사학자 손진태의 역사, 영문학자 이양하의 문학 강의를 들으며 우리 민족의 말과 글, 정신에 대한 감수성을 길렀다고 해요.

사실 저도 우리 학교, 그러니까 배화여학교 여러 선생님의 가르침을 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남궁억, 차미리사 선생님이 그립네요. 여성이기 이전에 조선인으로서, 또 지식인으로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지 가르쳐주셨죠.

아, 윤동주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식민지 조국의 현실, 정체성이 모호한 국경 밖의 경계인이라는 자신의 위치에 고뇌하며 자신의 생각을 시로 표현했어요.

시를 통해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았던 윤동주 시인이 1년이나 시를 쓰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전쟁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한 해였죠. 고민이 컸던 탓에 시를 쓰지 못했던 시인은 이후 자신의 방황과 고민을 솔직하게 표현한 시를 발표했어요. 그의 유명한 시 ‘서시’ 이때 작품이죠.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사촌 송몽규와 함께 ‘조선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아요. 그리고 널리 알려진 것처럼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후쿠오카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맑고 순결한 영혼이 스러지고 만 것인데요, 윤동주 시인은 또 다른 면모도 있었던 것 같아요.

2010년 윤동주의 재판 기록이 공개되었는데요, 그는 일본의 재판정에서 ‘조선 민족의 실력과 민족성을 키워 독립운동의 바탕을 키워야 한다.’라고 말했고, ‘조선 독립을 위해서 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은 패해야 한다’며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어요.

일본 유학 전에 윤동주는 시를 발표하려고 했지만, 일제치하에서 그의 시는 세상에 나올 수 없었고요, 해방 이후에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이름으로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의 흔적이 전해지는 또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걷는 그 길을 윤동주 시인도 걸었을 겁니다. 어떠세요? 뭔가 특별한 느낌이 들지 않으시나요? 이제는 윤동주 시인의 시를 자유롭게 읽고 감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참 감사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제부터 제가 안내할 길은 인왕산 숲길을 따라 수성동 계곡으로 가는 길입니다. 앞서 살펴본 ‘1.21’ 사건으로 생겨난 인왕산순환도로를 따라 만든 나무 데크와 오솔길로 이루어진 인왕산 자락길입니다. 조금 먼 길이지만, 그의 시와 함께 걸어 볼까요?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길〉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시와 함께 걷는 길, 시인과 함께 걷는 길이기도 하네요. 시를 읽으며 바라보는 풍경이 놀랍기만 합니다. 정말 장관이지요?

제가 학교를 다니 던 시절, 100여 년 전의 서울은 경성으로 불렸어요. 아직 조선, 대한제국의 분위기가 가득했죠. 조선인들이 모여 사는 기와집이 옹기종기 시내와 산자락을 가득 채우고 있었죠.

그러나 이전에 볼 수 없는 거대한 건물이 하나, 둘 들어섰어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경복궁 근정전을 가로막았던 거대한 조선총독부 건물일 겁니다. 또 남산에 있는 조선신궁은 마치 조선 땅을 억누르는 듯한 느낌을 주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모두 우리의 서울 모습 이지요. 서울, 참 가슴 벅찬 이름입니다. 그 서울을 바라보고 있으니 눈물이 나올 거 같아요. 그러고 보면 ‘우리’는 참으로 놀랍고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제가 안내할 다음 장소에서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할게요.

@등록기관 : 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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