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차이나타운
관광객들에게 여기 차이나타운은 그저 본토 주방장이 만드는 진짜 중국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한 세기가 넘도록 한국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온 화교들에겐 치열한 삶의 현장이랍니다. 부산 화교의 역사는 청관거리가 설치된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중국과 한국이 역사적으로 오래 교류해 왔던 것에 비하면 한국 화교의 역사는 의외로 짧은데요, 대신 현지 텃세에 시달렸던 다른 나라의 화교들과는 달리 초기의 한국화교들은 청나라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손쉽게 정착했지요. 화교들 사이에 익숙한 말로 ‘삼파도’ 라는 것이 있는데, ‘세 자루의 칼’ 이란 뜻이랍니다. 중국인들은 해외로 나갈 때 세 자루의 칼 중에 하나를 준비하는데, 하나가 요리에 쓰는 칼이고, 또 하나가 이발에 쓰는 칼, 마지막이 포목을 자르는 칼이라고 해요. 화교들 대부분이 음식점이나 이발소, 포목점을 하며 살아가는 것엔 이러한 연유가 있는 거죠.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차이나타운에서 만나는 화교들 대부분은 그 시절 정착한 청나라 상인들의 후손이 아니랍니다. 1930년대 대륙 침략을 노리던 일제가 일으킨 중일전쟁의 여파로 많은 중국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이죠. 현재 부산에 정착한 화교들은 해방 이후 공산화된 중국에서 억압을 피해 들어온 사람들과 한국 전쟁 당시 다른 지역에 살다 피난을 내려온 화교들의 후손들이 대부분입니다. 부산에 정착한 화교 1세대와 2세대들이 의외로 한국말을 잘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여느 피난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이곳에 영영 정착하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랍니다. 부산에 정착한 화교들의 삶은 한 순간도 녹록치 않았습니다. 반세기 가량 계속 된 냉전체제는 화교들에게 가본 적도 없는 나라, 대만을 국적으로 선택하도록 강요했습니다. 한국에 살고 있는 화교들의 대부분은 중국 본토 산둥성에서 왔는데 말이죠. 제3공화국 시절엔 화교들의 경제활동을 엄격하게 규제해 화교들은 부동산을 소유할 수도 없고, 일정 평수 이상의 가게를 내는 것도 불가능했답니다. 이런 차별 때문에 한국을 떠나는 화교들의 수가 적지 않았지요. 이렇게 100년이 넘는 동거의 세월에도 화교들은 이방인으로 냉대를 받아왔습니다. 우리는 쉽게 얘기합니다. 한국에 살면서 왜 국적을 바꾸지 않느냐고 말이죠. 그들은 말합니다. 한국에선 중국인으로, 중국에선 한국인으로, 대만에서 본토사람으로 취급받으며 어디 한 곳 마음 붙일 곳 없는 자신들에게 한국은 마음의 고향이 되어준 적이 없었다고요. ‘다양성의 시대’를 외치는 지금, 진정한 다양성의 존중은 함께 하는 이웃들에 대한 시선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