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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기관 최초 UNWTO 수상 (’14. 1. 22)

  오디가 제공하는 한국의 대표 관광지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용산구

인류 최초의 문화, 구석기 이곳은 구석기실입니다. 구석기시대는 인류가 도구를 만들고 불을 이용하면서 유인원과 다르게 문화를 만들어내는 시기예요. 한반도의 구석기시대는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약 70만 년 전부터 시작합니다. 이 시기부터 사람들은 사냥과 채집을 하며 생활했어요. 먹을 것을 찾아야 했기에 한곳에 머무르기보다는 식량이 풍부한 곳을 찾아다니며 동굴이나 강가에 살았죠. 구석기 사람들은 자연 그대로의 돌을 주워 쓰다가 점차 돌을 깨뜨려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어요. 처음에는 주먹도끼와 같이 큰 석기 한 개를 가지고 여러 용도로 사용하였지만, 점점 정밀하고 날카로운 도구가 필요하게 되었죠. 그래서 큰 돌에서 작은 돌을 깨뜨려 다양한 기능을 지닌 작은 석기를 만들었어요. 구석기시대 후기에 와서는 돌날과 같이 작고 세밀한 돌을 나무나 뿔에 결합하여 사용하고, 같은 것을 여러 개 만들 수 있는 석기제작기술이 발달하였죠. 이곳 구석기실에서는 시기별로 변화하는 석기와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확인해 보고 그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모습과 생활공간을 살펴볼 거예요. 자, 그럼 구석기로 들어가 볼까요?

국립공주박물관

충청남도 공주시

국립공주박물관

충청남도 공주시

백제를 다시 일으킨 무령왕 여러분 눈앞에 있는 흉상은 백제 제25대 임금인 무령왕이에요. 바람 앞의 등불 같았던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웠던 분이죠. 무령왕이 왕으로 오르기 전, 백제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백제의 전성기였던 4세기 중엽에는 한반도 남쪽 일대를 비롯해 중국과 일본의 해외무역을 장악하고 있었어요. 일본에 문화를 전파하는 등 정치와 문화를 꽃피웠던 시기였죠. 하지만 5세기 말, 고구려와의 오랜 전투로 국력을 소모하고 전투 중 왕마저 죽는 어려운 상황에 놓였어요. 이후, 수도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며 지금 공주인 웅진으로 눈물의 천도를 했답니다. 더구나, 내부분열이 심해져 귀족들에게 왕들이 피살되는 일들도 일어났죠. 그 어려운 시기에 등장한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는 무령왕입니다. 왕위에 오른 무령왕은 왕실을 위협하던 귀족 세력과 균형을 유지하며 점차 왕권을 강화해나갔어요. 그리고 민심을 다잡기 위해 수리시설을 확충하고 유민을 귀농시켜 경제적 안정을 꾀했죠. 이렇게 내실을 다지던 무령왕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도 연이은 승리를 거두고, 빼앗겼던 영토를 조금씩 되찾았어요. 또한, 중국 양나라와의 외교관계를 강화하고 일본에 문화를 전파하는 등 6세기 초 백제를 중흥으로 이끌었죠. 하지만 백제의 멸망 이후 천 년이 지나는 시간 동안 대부분의 유물들은 파괴되고 왕들의 무덤조차 모두 빈 껍질로 발견되어 백제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어요. 그런데 1971년, 기적처럼 무령왕의 무덤이 완전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 거죠. 그제서야 사람들은 기록으로만 존재했던 무령왕에 대한 진실, 찬란했던 백제인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살아서 위기의 백제를 중흥으로 이끈 무령왕. 1500년이 지난 오늘날, 잊혀져버린 왕국 백제의 신비를 보여주려 다시 나타난 거에요. 자, 지금부터 무령왕이 들려주는 백제의 이야기 속으로 함께 떠나볼까요?

국립경주박물관

경상북도 경주시

국립경주박물관

경상북도 경주시

돌과 흙이 전하는 역사-선사시대의 석기와 토기 [해설] 경주국립박물관의 첫 번째 방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방은 선사시대의 문화를 만날 수 있는 곳이에요. 선사시대는 문자가 없던 시절로 역사기록이 없는 시대를 말해요. 이 시대는 크게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로 구분하죠. 이 전시품들은 선사시대 중 신석기를 대표하는 빗살무늬토기예요. 책에서 많이 보았던 토기죠? [여학생] 네, 그런데 볼품도 없어 보이는데 이 토기가 신석기를 대표해요? [해설] 모양이 지금의 그릇과는 다르죠. 하지만 이 토기들을 통해 당시 인류 생활방식의 큰 변화를 볼 수 있어요. 신석기 시대에는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는데, 농작물을 보관하거나 조리한 음식을 담을 것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인류는 진흙을 구워 토기를 만들게 됐죠. 이렇게 토기가 나타나면서 채집과 사냥만을 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던 이전과는 달리 한곳에 편안히 정착을 하며 농사짓는 생활이 가능해졌답니다. [여학생] 하긴, 뭔가 담을 그릇이 없었다면 정말 불편했겠네요. 듣고 보니 토기가 조금 다르게 보이는데요. 어, 근데 토기가 밑바닥이 포탄처럼 뾰족하잖아요. 바닥에 놓고 쓰기 힘들 것 같은데요. [해설] 이 토기는 바닥을 조금 파서 세워두게 만든 것이에요. 다른 지방에서는 간혹 밑이 평평한 토기가 나오기도 하는데, 대부분의 토기는 밑이 뾰족해서 바닥을 조금 판 다음 세워서 사용을 했어요. [여학생] 아~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한 거네요. 그럼, 빗살은 뭐예요? 지금 그릇처럼 예쁘게 무늬를 넣은 건가요? [해설] 맞아요. 그 시대에도 예술적인 면이 있었죠. 미적 감각과 함께 빗살무늬는 무늬 없는 토기보다 불에 구울 때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고 해요. 그래서 빗살뿐 아니라 조금씩 다른 문양을 넣기도 했죠. 자 그럼, 다음 방으로 이동해 청동기 문화를 살펴볼까요?

경복궁

서울 종로구

경복궁

서울 종로구

[김내관] 왕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추는 광화문(光化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경복궁 남쪽의 정문인 광화문은 조선왕실의 상징적인 역할을 하는 문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문을 기준으로 안 쪽은 경복궁, 바깥쪽은 ‘육조거리’라 불리는 한성부(지금의 서울시청 역할을 하는 부서)의 영역과 백성들이 생활하는 종로거리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지나다니는 중심에 있는 광화문은 다락위에 종과 북을 달아서 시간과 소식을 알려주는 역할도 했습니다. [김상궁] “문 앞에 해치(해태) 한 쌍이 마치 ‘나는 정의를 수호한다!’라고 눈빛으로 말하는 것 같아요.” [김내관] “그렇지요? 아마 이 해치가 육조거리에 있는 관리들과 임금님이 바른 정치를 하도록 지켜보고 있다-- 는 의미로 세운 거라 그런 느낌이 들 거에요.” [김상궁] “해치가 양 옆에 있으니 든든하네요.! 와- 김내관! 나 이 문 처음 지나봐요! 천장에 봉황이 그려져 있네요!” [김내관] “정말 멋지네요! 원래 광화문은 중국에서 온 사신이나 왕실가족이 공식적으로 행차할 때 이용하는 문이지요. 저도 옆 문으로는 많이 다녔는데, 가운데 문으로 들어와 본 건 처음이라 신기하네요!. 참고로, 왼쪽 문은 낙귀부서(洛龜負書)로 거북이가 그려져있고, 오른쪽 문은 하마부서(河馬負書)로 말이 그려져 있어요 [김상궁] “광화문이 2010년에 여기로 돌아오기 까지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데, 당연히 멋지게 단장해야지요.! 광화문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건물에 밀려서 건춘문 근처로 갔다가, 한국 전쟁 때 폭격을 맞아 없어졌지요. 1968년에야 다시 복원을 했지만, 1990년대에 중앙청으로 불리던 조선총독부 건물이 없어지고 나서야 원래 자리로 오게 된 거잖아요. [김내관] “그래서 복원할 때 추녀마루에 잡상(어처구니)도 7개 딱! 올리고, 뒤로 보이는 북악산의 능선과 어우러지는 미적 요소도 딱! 살려놨지요! 예나 지금이나, 이 광화문이 여기에 있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마음이 벅차 오르는지, 다들 알고 있을거에요!” [김상궁] “어머, 웬일로 나랑 통했네요! 그러면, 이제 안에 가서 입장권 끊고 본격적으로 입궐해보자구요!”

창덕궁

서울 종로구

창덕궁

서울 종로구

[김내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창덕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앞에 보이는 문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입니다. 1412년에 처음 세워진 이 문은 임진왜란때 불타버려서, 1609년에 다시 지어졌습니다. 이 후 지금까지 이 자리를 지켜와 궁궐에서 가장 오래된 정문이 되었습니다. 돈화문을 이용할 수 있었던 건 임금님과 외국 사신들이었습니다. [김상궁] “역시 가장 오래된 문이라서 그런지 위엄이 있네요! 문도 되게 큰 것 같아요.” [김내관] “맞아요, 돈화문은 다른 궁궐의 정문과 다르게, 다섯 칸으로 설계되었지요. 특히 임금님이 지나가는 가운데 어칸은 양쪽의 문보다 더 넓게 만들었어요.“ [김상궁] “어쩐지, 어칸이랑 이어진 이 어도랑 넓이가 비슷하네요! 근데 이렇게 정문 바깥쪽까지 월대 위에 어도가 이어진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요! [김내관] “원래 모든 궁궐의 정문에는 월대가 있었어요. 돈화문의 월대는 일제강점기에 자동차를 타고 들어가기 위해 묻어버렸지요. 1997년에서야 이 월대를 되살리는 공사를 해서, 지금 다시 볼 수 있는거랍니다.” [김상궁] “임금님께서 행차 하실때, 이 문에서 월대까지 모두 나오는 모습이면, 진짜 멋있었을 것 같아요!” [김내관] “실제로 숙종 임금님 때, 이 곳에서 문과와 무과에 급제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이름을 불렀는데, 그 때 모인 사람만 해도 문과 9명, 무과 1만 4천 2백 7명 이었지요. 일부만 이름을 불렀는데도, 아침에 시작한 것이 점심까지 행사가 이어졌답니다.” [김상궁] “우와~ 임금님이 직접 나와서 이름까지 불러주시다니, 가문의 영광이네요!” [김내관] “그럼요! 합격자가 나온 고을에는 깃발을 세워서 알렸는데, 조선시대에 과거에 급제하는건 가문뿐만 아니라 그 마을에도 굉장한 영광이었지요.” [김상궁] “임금님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돈독하게 교화한다는 돈화문의 뜻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네요! 우리 그럼 임금님의 덕을 보러 창덕궁 안으로 들어가볼까요?” [김내관] “김상궁! 여기서 입장권 끊고 들어가야 해요! 같이 가자구요!”

창경궁

서울 종로구

창경궁

서울 종로구

[김상궁] 창경궁의 정문, 홍화문(弘化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홍화문은 창경궁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정문의 자리를 지켜온 문입니다. 창경궁은 조선 성종대인 1484년에 지어졌는데, 문의 이름은 당시 의정부 좌찬성이었던 서거정이 지었습니다. ‘홍화(弘化)’는 조화를 넓힌다는 뜻입니다. [김내관] “당시에 한양도성 동북쪽에 똑같은 이름을 문이 있었는데, 백성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 중종전하께서 동북쪽 문의 이름을 바꾸셨어요. 그 문의 이름이 ‘혜화문(惠化門)’이지요.” [김상궁] “지금의 창경궁 윗동네가 혜화동이던데, 거기서 동네 이름이 생긴 거군요.!” [김내관] “그렇지요! 또 지금은 홍화문 앞이 도로와 병원이지만, 예전에는 넓은 공터여서, 이 앞에서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고, 백성들에게 쌀을 나눠주기도 했어요.” [김상궁] “그런데, 보통 조선왕실의 궁궐은 정문을 남쪽으로 내지 않나요? 홍화문은 아무리 봐도 동쪽 방향인 것 같네요.” [김내관] “동쪽이 정문이 된 건 바로 종묘 때문이라 추측하고 있어요. 창경궁 아래쪽에 왕실의 사당인 종묘가 있잖아요. 그래서 창경궁을 지으면서 남쪽으로 정문을 내게 되면, 종묘의 영역을 침범하게 되니까, 문을 동쪽으로 낸 것이지요.” [김상궁] “생각해보니 그렇네요.입장권 끊으러 가면서 문 안쪽을 슬쩍 봤는데 바로 정전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나오는 것 같은데요?” [김내관] “창경궁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안에 들어가서 할 수 있으니, 어서 입장권 들고 같이 가봐요!”

종묘

서울 종로구

종묘

서울 종로구

조선왕조의 사당, 종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종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먼저 종묘가 자리한 이곳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볼까요? 조선시대, 이 일대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이 오가는 번화가였습니다. 나라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종묘 입구에는 종묘가 어떤 의미를 지닌 곳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물이 있는데요. 바로 ‘하마비’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이 앞을 지날 때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모두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춰야 했답니다. 조선을 건국할 당시 태조 이성계는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국가 최고의 사당, 종묘를 짓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자마자 궁궐보다도 종묘를 먼저 짓게 했습니다. 나라의 근본을 세우는 일이 시급했기 때문이죠. 종묘 건립의 의미는 조선의 건국이념인 효와 충을 국가 차원에서 실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국왕은 역대 왕과 왕비의 제사를 직접 주관함으로써 유교 사상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인 ‘효’를 실천하고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고자 했습니다. 즉, 태조 이성계는 왕실에서 효의 모범을 보이는 것으로 국가기강을 확립하고자 한 것이지요. 종묘에는 조상에게 충효를 다하는 것이 나라의 안녕과 번영을 이루는 길이라고 여겼던 조선왕조 500년의 사상과 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자, 이제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으로 들어서서 ‘종묘 안내판’으로 향해보시죠.

국립부여박물관

충청남도 부여군

국립부여박물관

충청남도 부여군

송국리식 토기의 특징 이 개성적인 모양의 토기는 무얼까요? 이 토기는 ‘송국리식 토기’라고 불리는 독창적인 민무늬토기랍니다. 신석기시대에는 빗살무늬토기가 만들어진 것과 달리 청동기시대에는 민무늬토기가 만들어졌어요. 그럼 다른 토기들과의 차이점을 알아보도록 하죠. 둥근 알을 닮은 독창적인 형태의 토기인 송국리식 토기는 좁고 평평한 바닥에 마치 달걀처럼 몸통이 부풀어 있으며 아가리는 밖으로 벌어진 모습이랍니다. 지금의 항아리와 많이 닮았어요. 특히 아가리에 목 부분이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인데, 청동기시대의 대부분 토기들은 목이 없는 형태를 가지고 있답니다. 독창적이면서도 개성 넘친 이 송국리식 토기는 금강유역에서 처음 발생하여 우리나라 서남부지역 전역으로 전파되었어요. 송국리식 토기는 잘 걸러진 점토만을 바탕흙으로 사용하여 만든 것이 있는 반면, 석영이나 장석을 다량으로 혼합해 만들어 그릇 표면이 거친 것도 있어요. 송국리식 토기들 가운데 특별하게 사용된 토기가 있는데 바로 ‘송국리식 독널’이라고 해요. 토기 바닥에 구멍을 뚫어 관으로 사용했어요. ‘송국리식 토기’가 발견된 남한지역 최대의 청동기시대 취락지인 부여 송국리 유적은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청동기시대 생활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랍니다. 그럼 다음에 보시는 토기는 어떤 곳에 사용되어진 토기였을까요? 함께 알아보도록 해요.

덕수궁

서울 중구

덕수궁

서울 중구

[김상궁] 덕수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덕수궁은 한양 도성 안에 있는 5개의 궁궐 중 하나이고, 원래는 왕실가족의 집이었습니다. 집주인은 세조의 손자이자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14대 왕 선조는 불타버린 경복궁 대신 이 곳에서 머물렀습니다. [김내관] “음. 그럼 전하가 머무르시는 곳이니, ‘시어소(時御所)’라 불러야 마땅하겠네요!” [김상궁] “쯧쯧, 대궐 밖에서는 정릉동에 있는 행궁이라 하여, 벌써부터 ‘정릉동 행궁’이라 한다구요. “ [김내관] “하지만, 곧 광해군께서 이 곳에 이름을 내리실거에요! 내 김상궁에게만 미리 알려주자면,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이에요!!” [김상궁] “어머나, 왠지 좋은 일만 가득할 것 같은 이름이네요.!! 그런데,나중에 경운궁에 대비께서 폐비되어 오실거라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진짜에요??” [김내관] “거…. 너무 많이 알면 다쳐요. 인목대비께서 폐비가 되시어 경운궁으로 오시게 되었어요. 광해군 전하와 사이가 좋지 않으니 이것 참…그 때 또 이름이 바뀌는데… 바로 ‘서궁’이지요.” [김상궁] “하지만, 곧 능양군(훗날 인조)께서 반정을 일으켜 경운궁이라는 이름을 다시 찾고, 즉조당과 석어당을 제외한 모든 집과 땅을 월산대군의 후손들에게 돌려 주시겠지요. 그리고 나중에는 사람들이 이 곳을 명례궁(明禮宮)이라 부른다구요. [김내관] “아니 근데, 지금 안내판에는 덕수궁이라고 되어 있는데??” [김상궁] “그 이름은 1907년에 대한제국의 황제가 된 순종황제께서 태황제(황제의 살아있는 아버지를 부르는 이름, 태상황)가 되신 고종황제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덕수(德壽)’라는 궁호를 내리신 거에요.” [김내관] “덕수궁이라는 이름 자체가 원래 퇴위하신 왕께서 머무는 궁에 붙이는 이름이니, 그러한 것이겠지요” [김상궁] “그래도 경운궁이라는 이름도 좋다는 생각이 드는걸요” [김내관] “어느 이름을 쓸 것인지는 지금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선택이지요. 자, 여러분은 과연, 어떤 이름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해인사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로 향하는 길 천년 고찰 해인사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곳 주차장에서 해인사 일주문까지는 등산로를 따라 약 1.5km를 올라가야 하는데요.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가야산 국립공원의 정취를 느끼면서 천천히 발걸음을 떼어보시죠. 등산로 왼편에서 들려오는 계곡의 물소리에 귀를 한번 기울여보세요. 이 계곡은 계절마다 각기 다른 풍경을 자아내는 것으로 유명해요. 여름에는 금강산의 옥류천을 닮았다 해서 옥류동 계곡으로 불리고요. 또 가을에는 붉게 물든 단풍의 아리따운 빛깔이 물에 스민다고 해서 홍류동 계곡이라고도 불리지요. 해인사 주변을 둘러보면 사찰 건물 뒤로 가야산이 병풍처럼 서 있고, 앞으로는 매화산이 펼쳐져 있는데요. 이렇듯 해인사는 자연과 한데 어우러져 있어 더욱 아름다움을 자아내죠. [해인사 종현스님] 해인사는 1967년도에 우리나라 최초로 해인 총림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총림은 종합수행도량을 가리키는 말인데요, 부처님의 말씀을 배우는 강원, 부처님께서 마음으로 깨달으신 내용을 배우는 선원, 부처님이 행동으로 보여주신 규율을 배우는 율원을 갖춘 곳입니다. 현재 해인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스님이 수행하고 계신 절로서 세계문화유산과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한 역사적인 전통과 문화를 지닌 곳입니다. 이제 곧 해인사가 간직하고 있는 찬란한 역사가 조금씩 문을 열어 보일 거예요. 일주문으로 향해 보시죠.

하회마을

경상북도 안동시

하회마을

경상북도 안동시

선비의 고장, 하회마을 어서 오세요. 뿌리 깊은 역사를 지닌 하회마을의 종부 인사드립니다. 종부라고 하니 좀 낯설게 느껴지시나요? 우리나라의 전통 마을은 가문의 맏이가 되는 집을 종가라고 하고 종손이 종가의 전통과 문화를 받들어 모셔왔는데요. 종손이 종가의 바깥주인이라면 종부는 바로 안주인을 말한답니다. 여기 하회마을은 좀 독특하게도 풍산 류씨 한 성씨가 한 마을을 이루며 모여 살아왔는데요. 제가 바로 풍산 류씨 가문의 종가 살림을 맡아보고 조상님 제사를 모시는 안주인 노릇을 하고 있지요. 마을을 찾아오는 손님맞이도 저의 몫이네요. 하회마을은 201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면서 더욱 많은 손님들이 찾아오는 고장이 되었거든요. 무엇보다도 조선시대 양반마을의 전통과 문화를 후손들이 600년 넘게 그대로 지키며 살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고 있는 문화유산 보존지역이지요. 마을에 대한 저희 가문의 자부심도 매우 크답니다. 새 손님이 오셨으니 마을 소개를 드려야겠죠? 안내판에 마을지도가 보이실 텐데요. 하회마을은 뒤로는 산이 있고 앞으로는 강이 흐르는 지형에 마치 연꽃이 물에 떠 있는 것 같은 모습입니다. 풍수지리에서도 살기 좋다고 하는 명당 중의 명당이죠. 그런 마을을 낙동강 강물이 휘감아 돈다고 해서 ‘하회(河回)’라고 불렀고요. 또 물이 돌아나가는 동네라고 해서 ‘물돌이동’이라는 정겨운 이름도 붙게 됐죠. 이 좋은 땅에서 조선시대에는 수십 명의 과거 급제가가 배출됐고 ‘징비록’을 쓴 서애 류성룡 등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 나오면서 하회마을은 오래도록 영남을 대표하는 양반마을이라는 명성을 얻고 있답니다. 유서 깊은 하회마을에 오셨으니 조선시대의 고택과 마을의 생활풍습, 뛰어난 인재들이 남긴 역사의 흔적과 충효의 정신까지 유네스코 세계유산다운 모습을 모두 만나고 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마을 속으로 직접 다가서 보시지요. 저는 그곳에서 다시 모시겠습니다.

부소산성

충청남도 부여군

부소산성

충청남도 부여군

백제의 마지막 보루, 부소산성 ‘궁을 지키는 성’이 백제에 있었어요. 들어보셨나요? 여기가 바로 그곳이랍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세요. 하늘과 맞닿아 있는 부소산 아래 산자락에는 사비백제의 왕궁인 사비성이 있었어요. 그 사비백제의 왕궁인 사비궁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산성이 바로 부소산성이에요. 백제시대에는 사비성 또는 소부리성으로 불리다가 현재는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고 불리고 있죠. 부소산성은 왜 궁을 지키는 성이 되었을까요? 저와 함께 부소산성을 둘러보시면 그 이유를 알게 되실 거예요. 부소산 주변에는 금강이 흐르고 있어요. 북에서부터 부소산을 감싸 안고 시원하게 흐르는 강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부소산성의 탄생 이유를 알 수 있게 되죠. 벌써 눈치 채셨군요. 맞아요. 동쪽을 제외한 3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이곳이 바로 천연의 요새라고 할 수 있죠. 특히 부소산의 지형은 보는 방향에 따라 달라지는데 외부의 적은 쉽게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고 내부에서는 외부가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특징이 있어요. 과거 고구려의 침입으로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 천도라는 치욕의 역사를 경험했던 백제에게 이곳은 백제 부흥을 위한 마지막 보루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죠. 백제의 부흥을 위해 사비천도를 감행한 성왕은 유사시에 왕궁을 수호하고 수도를 지킬 수 있는 성이 필요하다고 여겨 천도 전에 부소산성을 완성시켰어요. 그 이면에는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고 백제 부흥에 총력을 기울인 성왕의 강력한 의지가 숨어있다고 할 수 있죠. 사비시대의 중심 산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이곳 부소산성.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나라를 위해 사라져간 이름 없는 영웅들의 충절이 당당하게 서 있는 부소산성처럼 오래오래 남아있을 거예요. 부소산성에는 군사시설 외에도 삼충사, 고란사, 낙화암 등 다양한 유적이 있답니다. 삼충사는 세 명의 영웅들을 모신 사당인데, 그분들은 누구일까요?

전주 한옥마을

전라북도 전주시

전주 한옥마을

전라북도 전주시

승광재 승광재! 빛을 계승하는 집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데요. 빛(光)은 대한제국 연호인 광무(光武)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내부에 들어서면 처마에 달린 풍경 소리가 고즈넉이 우리를 맞아줍니다. 처마 밑으로 여러 개의 액자가 눈에 들어오는데요, 그 액자에는 1905년 고종황제가 경운궁에서 프랑스 대통령에게 일제의 조선 자주권 침탈을 폭로하고 조선독립 보장을 위해 노력해 줄 것을 요청한 친서와, 고종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의왕의 소년 시절과, 젊은 시절의 사진이 있습니다. 이곳에 왜 이런 것들이 있는지 궁금하시죠? 승광재는 황실 후원회가 운영하는 테마생활관으로 2004년 전주시가 조선의 마지막 황손인 이석씨를 위해 민가 네 채를 매입해 조성한 작은 한옥입니다. 이곳 승광재의 주인인 이석 씨는 의왕의 11번째 아들인데요, ‘아~~’ 하실텐데요. 귀에 익은 이 노래 ‘비둘기집’ 이란 노래를 히트시키며 가수로도 활동했답니다. 이곳 승광재는 이석씨가 머무르는 곳이지만, 조선왕조의 역사를 직접 체험 할 수 있는 한옥 체험시설이기도 하답니다.

미륵사지

전라북도 익산시

미륵사지

전라북도 익산시

모형으로 보는 웅장한 미륵사 안녕하세요. 저는 미륵사지의 복원 작업에 함께하고 있는 연구원입니다. 지금부터 천년 고찰 미륵사의 여러 유물과 유적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미륵사지유물전시관에 들어오시면 중앙 홀에 전시되어 있는 복원 모형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끕니다. 1400여 년 전, 이상적인 불교 국가에 대한 열망을 담아 백제인들이 지은 미륵사의 전경인 것이죠. 전시관 밖의 절터를 가득 채우고 있던 당시의 건물들을 떠올리는 데 큰 도움을 주는데요. 저를 비롯한 많은 연구원들이 오랜 시간 발굴해 온 성과를 바탕으로, 미륵사에서 사라진 건물들을 모형으로 재현해놓은 것이에요. 그럼 지금부터 미륵사의 주요 건물들과 전체 구조를 한번 살펴볼까요? 우선 앞쪽에 사찰의 대문이라 할 수 있는 남문이 서 있지요. 남북으로 일렬로 배치된 중문과 탑, 그리고 불상을 모신 금당이 하나의 사원인데, 이 사원 3개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이죠. 한눈에 봐도 사찰의 건물 배치가 일정한 비율로 대칭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요. 가운데 목탑과 금당을 중심으로 양쪽에 석탑과 금당이 대칭을 이루며 서 있지요. 이처럼 대칭이 되도록 건물을 세우는 것은 전체적인 조화와 안정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인데요. 건물 하나하나에 깃든 건축술도 물론 중요하지만, 건물들 간의 조화를 먼저 생각하고 계획한 백제인의 건축 미학이 놀라움을 자아냅니다. 동서로 178미터, 남북으로 148미터인 절터와 그 안에 세워진 건축물들을 볼 때, 미륵사는 삼국시대 당시 동양 최대의 건축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지금은 모형을 통해 확인할 수밖에 없지만, 전시관 밖의 절터를 돌아볼 때 사라진 건물들을 눈앞에 그려보는 건 어떨까요? 어쩌면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복원일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 미륵사지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본격적으로 만나볼까요?

마곡사

충청남도 공주시

마곡사

충청남도 공주시

[남자] 충청남도 공주시에 위치한 마곡사에는 마곡사 솔바람길이라 불리는 길이 있습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백범 명상길이라고 불리기도 하죠. [여자] 마곡사는 천년 고찰로서 태화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마곡사가 위치한 곳의 물과 산의 형세는 태극형이라 하여 택리지나 정감록 등의 비기에서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의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마곡사 사적 입안의 기록에 따르면 마곡사는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고려 명종 때는 1172년 보조국사가 중수하였고 범일 대사가 재건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남자]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할 당시만 하더라도 30여 칸에 이르는 대사찰이었으나 현재 마곡사는 대웅보전을 비롯한 대광보전, 영산전, 사천왕문, 해탈문 등의 전각들이 가람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자] 마곡사는 백범 김구 선생과 인연이 깊은 사찰입니다. 바로 이 사찰에서 백범 선생은 머리를 깎고 출가를 해서 승려 생활을 한 적이 있었는데 법명은 원종이라고 불렸습니다. 또한 대광명전 앞에는 백범 선생이 심은 향나무가 남아 있습니다. [남자] 마곡사는 2018년 6월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그런 마곡사는 울창한 소나무 숲은 물론 매화 향취로도 유명한 사찰입니다. [여자] 마곡사 솔바람 길은 그런 사찰에 또 하나의 관광명소이자 트레킹 코스로 개설되었습니다. 태화산의 울창한 소나무와 백범 김구 선생의 이야기가 합쳐져 만들어졌습니다. 솔바람 길은 총 3코스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관광객] "아, 좋다. 가이드 선생님 여기가 어딘가요?” [가이드] “여기가 마곡사의 있는 솔바람 길입니다.” [관광객] “솔바람 길이요? 그래서 소나무가 많나?” [가이드] “솔바람 길은 3코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관광객] “많이도 되어 있네요. 보통은 한 개의 길로 구성되어 있지 않나요?” [가이드] “그게 솔바람 길의 특징입니다.” [관광객]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릅니까?” [가이드] “네, 1코스는 일명 백범 명상길이라고 불립니다. 3km 거리의 산책 코스입니다. 마곡사를 출발하여 김구 선생 삭발터를 지나 군왕대를 거쳐서 다시 마곡사로 돌아오는 코스입니다.” [관광객] “2코스는요?” [가이드] “2코스는 백범 길이라고 불리는 5km의 트레킹 코스입니다. 마곡사를 출발하여 천연송림욕장을 경유해 은적암, 백범 선생이 기거했던 백련암을 거쳐 활인봉, 생골 마을을 돌아서 다시 마곡사로 오는 코스로 되어 있습니다.” [관광객] “1코스보다는 코스가 기네요. 그럼 3코스는 1, 2코스보다 더 긴가요?” [가이드] “네. 맞습니다. 3코스는 송림 숲길이라 불리는 코스입니다. 솔바람 길의 풀코스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2코스의 백련암까지는 코스가 같지만, 그 후 아들 바위와 나발봉을 거쳐 한국문화연수원, 죽음 체험장인 다비식장을 지나게 됩니다. 그리고 군왕대를 거쳐서 다시 마곡사로 돌아오는 총 11km의 구간입니다.” [관광객] “역시 예상이 맞았군요? 그럼 우리는 1, 2, 3코스 중 어디로 가나요?” [가이드] “우리는 1코스인 백범 명상길로 갑니다.” [여자] 마곡사의 솔바람 길은 솔향기 가득한 숲길로 백범 선생의 이야기까지 느낄 수 있는 스토리가 있는 길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대흥사

전라남도 해남군

대흥사

전라남도 해남군

[남자] 부도밭을 지나서 대흥사에 들어서면 해탈문이 나타납니다 [후배] “선배! 여기요 여기 빨리 오세요.” [선배] “천천히 가자. 그렇게 급하게 안 가도 된다.” [후배] “여기가 해탈문이래요. 그런데 보통 사찰 입구에는 일주문을 지나면 천왕문이 있지 않아요? 신기하게 여긴 천왕문을 지나치지 않았는데 해탈문이 있네요? 해탈문이 뭔가요 선배?” [선배] “음·· 불교 우주관에 따르면 수미산이라고 불리는 산이 있어.” [후배] “산이요?” [선배] “응, 산! 세계의 중앙에 있는 산으로 인간에게 정복된 적이 없는 산이자 신성불의 성소라고 불리는 상상 속의 산이야. 그 산 정상에 제석천왕이 다스리는 도리천이 있고, 거기에는 불이문이라고 불리는 문이 있어.” [후배] “불이···문이요?” [선배] “그 불이문이 바로 해탈문이야. ‘불이’는 부처와 중생, 선과 악 등 서로 대립되는 것 같은 두 가지가 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서로 다르지 않다는 뜻을 담고 있지. 속계를 벗어나 법계로 들어가는 문이야. 해탈문을 통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에 갈 수 있다는 상징인 거지. 그리고 대흥사에는 천왕문이 없는 이유가 따로 있어.” [후배] “그게·· 뭔데요?” [선배] “자 봐. 사찰을 기준으로 봤을 때 북쪽으로는 영암 월출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송지 달마산이 있어. 그리고 동쪽으로는 장흥 천관산, 서쪽으로 화산 선은산이 대흥사를 감싸고 있어. 이건 풍수적으로 완벽한 형국을 취하고 있어서, 동서남북 사방에서 부처의 법을 지키기 위해 세우는 사천왕을 모신 천왕문을 세울 필요가 없었던 거야. 그래서 천왕문을 거치지 않고 해탈문에 바로 이를 수 있는 거지.” [후배] “아! 그렇구나.” [여자] 2002년에 건립된 대흥사 해탈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되어있습니다. 내부에는 사자를 탄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가 있습니다. 문수보살로도 불리는 문수는 문수사리 또는 문수시리의 준말로 산스크리트어로는 만주슈리라 불립니다. 만주는 달다, 묘하다, 훌륭하다는 뜻이고, 슈리는 복덕이 많다, 길상 하다는 뜻으로 합하면 훌륭한 복덕을 지녔다는 뜻이 됩니다. 이 문수보살은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인도에서 태어났으며, 반야의 도리를 선양한 이로, 항상 반야 지혜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자] 보현보살로도 불리는 보현은 석가모니불의 협시보살로 지혜의 화신인 문수보살과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보현보살은 석가모니불을 오른쪽에서 협시하는 보살로서 불교의 진리와 수행의 덕을 나타내는 보살입니다. 비로자나불의 협시보살로도 알려져 있는데 흔히 흰 코끼리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거나 연화대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문수보살이 지혜를 맡고 있다면, 보현보살은 자비실천의 덕행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보현보살은 산스크리트어로 ‘사만타바드라’라고 불립니다. [여자] 대흥사 해탈문의 외부 협칸 3면에는 도륜 박태석이 그린 부모은중, 염화시중, 점성가제도가 주제별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2002년 건립 당시 단청과 함께 조성되었습니다.

화순 고인돌 유적지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 고인돌 유적지

전라남도 화순군

[문화해설사] “화순 대신리 발굴지는 화순 고인돌 유적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하여 1999년 발굴 조사되었습니다. 현재 발굴지가 있었던 곳은 평범한 논이었습니다. 1995년도에 화순지역 고인돌이 처음 발견되어 학계에 보고되었고 이후에 발굴조사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관광객] “이곳 대신리 발굴지에서 발굴 조사로 확인된 고인돌은 총 몇 개가 있나요?” [문화해설사] “화순 대신리 발굴지는 35기의 고인돌이 발굴 조사되었습니다. 그중 보호각 입구 쪽 고인돌 4기는 발굴 조사 후 원형 그대로 복원해 놓았는데요. 고인돌의 처음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서 교육적인 목적으로도 활용되고 있습니다.” [관광객] “보호각 내부에는 어떤 것들이 전시되어 있습니까?” [문화해설사] “고인돌 발굴지 보호각 내부에는 고인돌의 무덤방을 확인할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는데 무덤방의 구조와 형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관광객] “무덤방만 있는 건가요?” [문화해설사] “아닙니다. 무덤방 외에도 발굴 조사 당시에 출토된 유물들도 같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무덤방은 발굴할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발견된 유물은 가락바퀴, 갈돌과 갈판, 무문토기, 돌화살촉 등이 있습니다.” [관광객] “가락바퀴는 뭔가요?” [문화해설사] “가락바퀴는 일명 방추차라고도 불리는데, 짧은 섬유의 경우 섬유를 길게 이으며 뒤꼬임을 주어 실을 만들고, 긴 섬유의 경우 꼬임만을 주어 실을 만드는 방적구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입니다. 가락바퀴는 그 중앙에 둥근 구멍이 뚫려 있고, 그 구멍을 통하여 가락바퀴의 축이 될 막대를 넣어 고정한 상태로 만들어서 실을 만들었습니다. 가락바퀴가 고인돌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그 시대에 의복을 만들어 입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관광객] “갈돌은요?” [문화해설사] “갈돌은 일명 석봉이라고도 불리는데 갈판 위에서 왕복운동을 하며 곡물이나 야생 열매 등의 껍질을 벗기거나 가루로 만드는 연장으로 갈판과 짝을 이루어 쓰인 석기입니다.” [관광객] “무덤방 위에 있었던 덮개돌들은 어디에 있나요?” [문화해설사] “화순 대신리 발굴지 보호각의 오른편을 보시면 고인돌 덮개돌을 모아서 전시해 놓은 곳이 있습니다. 2008년 보호각을 세울 때 보호각 내의 무덤방을 직접 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덮개돌을 원래대로 복원시키지 않고 한 곳에 모아 두었습니다.” [나레이션] 화순 대신리 발굴지는 고인돌의 분포 의미와 변화 과정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부석사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사

경상북도 영주시

[선생님] “이곳이 부석사 당간지주예요. 우리나라 보물 제255호로 지정된 곳이죠.” [학생] “당간지주가 뭐죠? 솟대 같은 건가요?” [선생님] “당간은 사찰 입구에 세우는 깃대의 일종입니다. 찰간, 장간, 정간, 기간, 치간, 번간, 범장이라고 불리기도 하죠. 절에 법회나 기도 등의 행사가 있을 때 절에 입구에 당이라고 불리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당을 걸어두는 기둥을 당간, 이 당간을 버티도록 해주는 것이 당간지주라고 부릅니다.” [학생] “아, 깃발을 거는 거군요.” [선생님] “당간은 파사현정이라는 뜻이 있어요. 풀어서 얘기 하면 바르지 못한 도리를 파괴하고 바른 진리를 드러낸다는 뜻을 가지고 있죠.” [학생] “파사현정··· 그런데 선생님 깃발이 보이지 않는데요?” [선생님] “보통은 당간 끝에 당을 달아 두지만 애석하게도 현재 당이 남아있지 않고, 이렇게 당간을 지탱하는 지주만 남아 있어요.” [학생] “이 당간지주는 꽤 오래돼 보이는데요?” [선생님] “이 당간지주는 부석사 창건 당시에 세워졌어요. 부석사가 세워진 게 신라시대니까 약 1300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죠.” [학생] “대단하네요. 선생님. 1300년의 역사라·· 저흰 지금 그 역사의 증거 앞에 있네요.” [선생님]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남자] 부석사 당간지주는 두 지주가 1m 간격으로 동서로 마주하고 있습니다. 마주 대하는 부분에는 아무런 꾸밈이 없습니다. 앞 뒤 양 측면에는 가장자리에 폭 5.4cm의 선이 양각되어 있고, 위쪽에는 이 선대와 연결된 너비 5.1cm의 선이 세로로 양각되어 있습니다. 양 지주의 꼭대기에는 내면 상단에서 외면으로 내려오면서 호선을 그리며 외부로 깎였는데 1단의 굴곡을 두었습니다. [여자] 이 굴곡부에서 앞·뒷면의 중앙 종선문이 내려와 있어 상부는 정상부에서 2단의 유려한 원호가 경사진 형태로 만들어져 있고, 측면은 3조의 종선문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당간을 고정하는 간은 한 곳에만 간구를 마련하여 장치하였고 내면 상단에 장방형의 간구를 파서 간을 끼우게 했습니다. [남자] 양 지주의 기단부는 현재 완벽하게 존재하지 않으며 그 밑바닥에 장대석과 잡석으로 구축한 석단이 있을 뿐입니다. 지주 아래쪽의 자연면석이 노출된 점과 현재의 구축된 기대 등으로 보아 장방형의 기단이 시설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여자] 양 지주 사이에는 간주를 받는 원형으로 된 대석이 있어서 간대임을 알 수 있는데, 이 간대는 1석으로 되었으며 방형의 하대 위에 원좌를 만들었습니다. 원좌 주변에는 테두리 장식과 연화문을 꾸며 놓았고 윗면 중앙에 지름 30cm의 원공을 뚫어서 당간의 밑면을 받치고 있습니다. 단아한 각 부분의 조각 기법으로 보아서 통일신라시대 9세기 전후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창 고인돌 유적지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 고인돌 유적지

전라북도 고창군

[친구1] “표는?” [친구2] “여기 있어.” [친구1] “고창 고인돌 박물관이 우리나라 최초의 고인돌 박물관이래.” [친구2] “그래? 여기 엄청나게 크다.” [친구1] “183억을 투입해서 약 57,988m2 부지에 연면적 약 3852.8m2 규모로 건립되었다고 하더라고” [친구2] “엄청나구나···” [친구1] “고인돌 박물관에는 청동기 시대의 각종 유물과 세계 고인돌 문화를 볼 수 있다고 하더라고! 거기다가 입구에서 표를 사면 탐방 열차를 타고 고인돌 유적 1코스에서 5코스까지 탐방을 할 수도 있어.” [친구2] “그리고 고창 고인돌 박물관은 청동기시대 각종 유물 및 생활상, 그리고 세계의 고인돌 문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고 해. 고인돌 전문박물관으로서 내부 전시와 외부 전시로 나뉘어서 관람할 수 있대.” [친구1] “내부 전시는 뭐가 있는데?” [친구2] “내부는 1층 기획전시실과 유물을 보관할 수 있는 수장고로 구성되어 있어. 2층은 상설전시실로 청동기인 생활상과 고인돌에 관한 학술 자료를 쉽게 접할 수 있고, 3층은 체험전시실로 불 피우기, 암각화 그려보기, 고인돌 만들기 등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되어 있어. 외부 조망 망원경이 설치되어 야외전시공간과 유적지를 전망할 수 있게 해 놨지.” [친구1] “그럼 외부 전시는?” [친구2] “외부 전시는 선사마을, 체험마당, 전시마당으로 구성되어 있어. 선사마을은 고인돌을 축조했을 당시의 마을을 복원하여 고인돌 시대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이해하기 쉽게 전시되어 있어.” [친구1] “그럼 우리는 내부 전시를 먼저 보자!” [친구2] “그래.” [남자] 고창 고인돌 박물관은 전문 고인돌 박물관답게 고창지역 고인돌 유적뿐만 아니라 세계유산인 화순지역, 강화지역 고인돌 유적에 대한 자료도 직접 만나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세계유산과 세계 거석문화 등 다양한 학습자료를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자] 고창 고인돌 박물관 관람 시간은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까지이며 동절기인 11월에서 2월까지는 오전 9시에서 오후 5시까지만 운영하고 있습니다. 휴관 일은 매년 1월 1일과 매주 월요일에 하고 있습니다.

강화 고인돌 유적지

인천 강화군

강화 고인돌 유적지

인천 강화군

[남자] 우리나라에 분포된 고인돌은 일명 북방식으로 불렸던 탁자식 고인돌과 남방식으로 불리던 바둑판식 고인돌, 받침돌이 없는 개석식 고인돌,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위석식 고인돌 등이 있습니다. [여자] 탁자식 고인돌은 넓은 판석으로 축조한 무덤방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형식으로, 판석 4매 혹은 6매 이내로 짜 맞춘 무덤방 위에 납작한 덮개돌을 올린 고인돌입니다. 외관이 책상처럼 생겨서 탁자식이라고 불립니다. [남자] 바둑판식 고인돌은 지하에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굄돌 일명 받침돌을 4개에서 8개 정도 놓습니다. 그 받침돌 위에 커다란 덮개돌을 덮어 올린 방식으로 바둑판처럼 보인다고 하여 바둑판식 고인돌로 불립니다. 외형상 지표면에서 들려 있어 웅장하게 보이는 바둑판식 고인돌은 뚜렷한 무덤방이 없는 것이 많습니다. [여자] 개석식 고인돌은 지하에 만든 무덤방 위에 바로 뚜껑으로 덮은 형식의 고인돌입니다. 받침돌이 없이 바로 무덤방을 덮은 개석식을 무지석식, 뚜껑식, 대석개묘 등으로 부르고도 있습니다. 개석식 고인돌은 거의 돌로 만든 무덤방이 확인되고 있어 원래 무덤으로 만들어졌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요동반도, 한반도, 일본 규슈지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어 고인돌 형태 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인 무덤으로 쓰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자] 제주식이라 불리는 위석식 고인돌은 무덤방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데, 수매의 판석이 덮개돌의 가장자리를 따라 돌려 세워진 형태입니다. 지상에 드러난 판석들의 수가 6매 이상으로 덮개돌의 평면 형태와 유사하게 무덤방 형태를 하고 있어 대개 타원형이나 방형에 가까운 무덤방 형태가 특징입니다. 우리나라 고인돌 중 위석식 고인돌은 제주도에서만 보이는 형태입니다. [여자] 강화 대산리 고인돌은 고려산의 동쪽 봉우리인 북산의 북쪽능선의 맨 마지막 자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해발 20m 높이 능선 대지 위에 있습니다. [친구1] “여기 좀 봐, 여기” [친구2] "왜? 어? 이게 고인돌이야?” [친구1] “응, 고인돌이 무너져서 덮개돌이 내려앉았대.” [친구2] “고인돌이 무너지기도 하는구나!” [친구1] “탁자식 고인돌은 그럴 수 있지. 그나저나 ·· 이 무덤 주인 입장이면 좀 그렇겠다. 자기 무덤이 무너진 거니··” [친구2] “무덤?” [친구1] “고인돌이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라고 알려져 있잖아. 물론 무덤 말고도 묘표석으로 사용되었거나 제단의 기능을 하는 고인돌도 있지만 말이야” [친구2] “청동기라니··· 그렇게 오래된 거였어? 고인돌이란 게?” [친구1] “응, 그럼. 아깝다. 원형 그대로 남아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친구2] “이거라도 남아 있는 게 어디냐.” [여자] 강화 대산리 고인돌은 무너진 상태에서 덮개돌이 내려앉아 있습니다. 고인돌 무덤은 오른쪽의 크기가 길이 2.4m 너비 1.5m, 높이 0.45m이고, 왼쪽의 크기는 1.6m, 너비 1.3m, 높이 0.3m입니다. 덮개돌은 길이 3.68m, 너비 2.6m, 두께 0.5m로 되어 있습니다. 강화 대산리 고인돌은 탁자식 고인돌이 내려앉아 현재와 같은 모양이 되었습니다.

구룡사

강원도 원주시

구룡사

강원도 원주시

구룡사 소개 “백두대간의 주맥이 오대산을 거쳐 서쪽으로 태기산을 지나 치악산에 이르면, 그곳에 천년고찰 ‘구룡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치악산 구룡사는 창건 이후 도선, 무학, 효정 등 위대한 고승들이 머물면서 영서지방의 으뜸 사찰로서의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신령스러운 거북이 연꽃을 토하고, 아홉 바다의 용이 구름을 풀어놓은 형상을 한 천하제일의 명승지, 구룡사는 그 이름처럼 용이 머물던 최고의 절터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구룡사가 명성을 높인 가장 큰 이유는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곳에서 수많은 큰 스님들이 수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구룡사는 신라 문무왕 8년인 668년 의상대사가 창건했으며, 신라 말 고려 초, ‘도선국사’의 ‘비보사찰’, 즉 ‘명산에 절을 세우면 국운을 돕는다는 뜻에 따라 세운 사찰 중의 하나입니다.” “구룡사는 하늘 높이 뻗어난 금강송의 세월만큼이나 장구한 시간을 보낸 곳으로 오랜 역사와 더불어 신비로운 전설을 품고 있습니다.” “강원도 원주 치악산 국립공원 안에 자리잡고 있는 구룡사는, 스님들과 신도들의 기도가 끊이지 않는 전통사찰입니다.”

단양팔경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팔경

충청북도 단양군

도담삼봉과 정도전 설화 [여행자] 이곳 단양은 충주호 건설로 옛터가 물에 잠긴 뒤 새로 자리를 잡은 곳이랍니다. 신 단양이라 불리는 이곳을 남한강이 굽이지며 가로지르고 있는데요. 남한강 상류 12킬로미터 주변에 단양팔경이 흩어져있어요. 그 중 도담삼봉, 석문, 사인암, 구담봉, 옥순봉은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으로도 지정되었죠. 환상적인 풍광을 자아내는 단양의 명승지를 물길 따라 방문하고 싶으시다면, 충주호 유람선을 이용하세요. 약 한 시간 동안 배 위에서 편안히 경치를 감상하실 수 있답니다. 그럼, 물과 바위가 어우러진 단양팔경 중 첫 번째. 도담삼봉을 먼저 둘러보도록 해요. 단양시내에서 제천방향으로 가다보면 짙은 초록의 남한강 한복판에 큼직큼직한 돌산 세 개가 보입니다. 너울거리는 물그림자 때문에 더욱 운치가 있는 도담삼봉이에요. 도담삼봉 중 가장 높은 봉우리 ‘중봉’은 장군봉이라고도 불러요. 높이가 6미터나 되는 장군봉에는 삼도정이라는 정자가 있죠. 중봉 오른쪽에 바짝 붙어 애교를 부리는 봉우리는 ‘첩봉’ 또는 ‘딸봉’이라 불러요. 왼쪽 봉우리는 ‘처봉’ 또는 ‘아들봉’이라 부르고요. 이름이 재미있죠? 도담삼봉의 기묘한 경치를 보고 감탄하며 시를 읊었던 선비들이 옛 부터 참 많았답니다. 퇴계 이황 선생은 해지는 도담삼봉의 풍경을 보며 이런 시를 지으셨죠. [이황] 산은 단풍으로 물들고 강은 모래벌로 빛나는데, 삼봉은 저녁놀을 드리우네. 신선은 배를 대고 푸른 절벽에 올라, 달빛으로 너울대는 물결 보려 기다리네. [여행자] 정말 신선이 보러 올 것 같은 경치에요. 실제로 해가 지면 물에 비친 여섯 개의 봉우리가 더욱 선명해지면서 ‘도담육봉’을 이룬다는데요. 누구나 시 한편 읊고 싶을 만큼 절경이라고 합니다. 이황 선생은 이런 풍경에 반해 자청해서 단양의 군수로 오시기도 했어요. 단양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이윤영도 그의 기행문에 도담삼봉을 생생히 묘사했답니다. 들으면서 여러분의 시선을 찬찬히 옮겨보세요. [이윤영] 강은 넓어서 활을 힘껏 당겨야 화살이 건너편에 닿을 만하다. 가운데 봉은 넓은 돌로 되었고 돌 빛은 심회색이다. 표면은 주름살이 잡히고 돌이 깎인 형상은 꼽추와도 같으며 괴석의 봉 위에는 작은 돌이 뾰죽뾰죽 늘어섰다. 북쪽 봉은 쓰러져 머리를 들고 중봉을 돌아다보며 교태를 짓는 것 같이 물 위에 나와 있다. 남쪽 것은 그 형상이 이끼 낀 듯하다. 멀리 바라다보면 사람이 유희하는 것 같고 거꾸로 물에 그림자를 이루어서 가히 볼만한 광경이다. [여행자] 도담삼봉은 특히 조선왕조를 설계하는데 큰 공을 세운 위인 ‘정도전’의 쉼터였어요. 도담삼봉 앞 공원에 그의 동상이 서 있기도 하죠. 어린 시절부터 그는 근방의 경치를 즐겼고,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 지을 만큼 이곳을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에 관해 재밌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어요. 고려중엽, 큰 장마가 생겨 강원도 정선에 있던 세 개의 봉우리가 이 자리까지 떠내려 왔다는 이야기가 돌았어요. 바로 도담삼봉을 말하는 것이죠. 정선의 것을 단양이 가지고 갔다 해서 단양에서는 정선에 세금을 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금을 받으러 온 정선 관리에게 당시 7살이었던 정도전이 이렇게 말을 했어요. [정도전] 단양이 도담삼봉을 갖고 싶어서 가진 게 아닙니다. 삼봉이 물길을 막아 오히려 피해를 보고 있으니, 도로 가져가 주세요! [여행자] 정선 관리는 이 말을 듣고 크게 고민했답니다. 돌산을 뽑아 배에 싣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요. 관리는 멋쩍게 돌아갔고 이후부터 단양은 세금을 내지 않았대요.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어린 정도전의 당찬 기지에 저절로 웃게 되는 이야기예요.

선암사

전라남도 순천시

선암사

전라남도 순천시

[남자] 순천 조계산에는 천년불심길이라는 트레킹 코스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선암사에서 시작하는 트레킹 코스는 송광사에서 그 끝맺음을 하고 있는데요. 그 길이는 약 12km입니다. 스님들이 수행하면서 걸었던 길을 걸으면서 명상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을 주제로 만들어진 길입니다. 선암사의 창건에 관한 이야기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백제 성왕 때 아도화상이 지금의 조계산 중턱에 비로암이라는 암자를 지었는데 이것을 성왕 7년인 529년에 청량산 해천사라 하였고, 선암사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신라 헌강왕 1년인 875년에 도선국사가 비보사찰로 창건하면서 선암사라 하였다는 설입니다. [여자] 박전지가 쓴 ‘영봉산용암사중창기’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성모천왕] "도선아·· 도선아!” [도선국사] “당신은 누·· 누구십니까?” [성모천왕] “나는 지리산의 성모천왕이다. 내 너에게 해줄 말이 있구나.” [도선국사] “어떤 말씀 이십니까? 성모천왕이시여.” [성모천왕] “마한, 변한, 진한이라 불리는 삼한이 하나가 되려면 3개의 절을 창건해야 한다. 그리하면 전쟁이 저절로 종식할 것이고 평화로워질 것이다. 도선아 잊지 말거라·· 반드시 3개의 절을 세워야 한다.” [도선국사] “알겠습니다. 3개의 절을 꼭 세우겠습니다.” [여자] 성모천왕의 말에 따라 도선이 창건한 3곳의 절은 선암사, 운암사, 용암사였습니다. [남자1] “자네, 여기가 왜 선암사라고 불리는지 아는가?” [남자2] “모르는데요?” [남자1] “선암사의 절 서쪽에 높이가 10여 장 되는 평평하고 큰 돌이 있어. 옛날부터 사람들은 그곳을 선인이 바둑 두던 곳이라 하였고, 그 바위 때문에 선암이라는 절 이름이 생겨났다고 해.” [여자] 천년불심길 끝에 위치한 송광사는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산에서 비롯된 것으로 송광에 대한 몇 가지 해석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먼저 구전되어 내려오는 전설에는 이 산이 장차 ‘십팔공이 배출되어 불법을 널리 펼 훌륭한 장소’라 송광이라고 하였습니다. 소나무 송자를 십팔공이라 파자하고 광자를 불법 광포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죠. 파자는 한자의 자획을 풀어서 나눈 것을 말합니다. 송광의 또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영수는 이 산에 솔갱이가 가득 차 있었으므로 지방 사람들이 이산을 예로부터 ‘솔메’라고 불렀고 그리하여 송광산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으로 주장하였습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송광의 광자는 원래 언덕을 의미하는 강에서 변형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승려 임석진은 ‘송광사사지’를 저술하면서 김영수의 해석을 가장 타당하다고 보았습니다. [남자] 선암사에서부터 송광사까지 가는 길에는 여러 가지 볼 것들이 있습니다. 야생차를 시음해 볼 수 있고, 다도와 다례를 배워 볼 수 있는 야생차 체험장도 있습니다, 큰 굴목재와 송광굴목재를 거쳐 가면서 숲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천년불심길의 마지막에 있는 송광사에서 남한 유일의 곱향나무이자 천연기념물인 쌍향수를 볼 수 있는데요. 이 나무에 손을 대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전설이 있어 많은 사람이 찾고 있습니다.

봉은사

서울 강남구

봉은사

서울 강남구

진리의 길로 나아가는 일주문 [해설자] 봉은사는 일주문부터 여느 사찰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인데요. 보통은 현판에 사찰이 있는 산의 이름과 사찰 이름이 걸리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봉은사 일주문에는 진여문(眞如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저기, 보이시죠? 모든 사물의 본모습을 파악하고 절대 진리의 길로 나아가라는 의미를 품은 일주문이죠. [방문자] 일주문에 왜 이 이름을 썼을까요? [해설자] 이 현판이 걸리게 된 이유는 이곳이 조선 시대 승려들의 과거시험인 승과(僧科)가 실시되던 시험장이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조선 중종의 왕비였던 문정왕후는 봉은사를 크게 중창한 뒤 보우(普雨)대사를 통해 승과를 실시했습니다. 조선 개국 이래 크게 위축되었던 불교는 문정왕후라는 강력한 후원자를 만난 덕분에 조선 불교의 역사를 알려 주는 이 현판이 봉은사에 남아 있게 되었지요. 진여문은 사천왕이 둘씩 문 양쪽에서 지켜보고 있어요. 사천왕상은 18세기의 다른 사천왕상과 비교할 때 입상임에도 다른 상보다 크기가 작고, 어깨 위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전혀 없고, 귀고리도 없고 불의 기운이 전혀 표현되지 않은 점이 아주 독특하지요. 갑옷을 입은 사천왕은 성격에 따라 각기 지물(持物)을 들고, 때로는 발로 악귀를 밟고 있는 험악한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봉은사 사천왕상은 독특하게도 다른 사천왕상들과는 달리 무섭다기보다는 위엄 있되 온화한 미소를 띤 수호자의 모습으로 불자를 맞이하지요. [방문자] 도심 속 사찰답게 모든 것이 깔끔하고 도시적인 느낌을 주네요. 외국인들도 많이 보이고요.

월정사

강원도 평창군

월정사

강원도 평창군

월정사로 가는 관문, 일주문과 금강교 [해설자] 643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천 년 고찰 월정사로 향하는 길은 금박 현판을 단 일주문 ‘월정대가람(月精大伽籃)’에서 시작되는데요, 일주문을 지나면 방문객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건 천 년의 기다림을 간직한 아름드리 전나무들입니다. [방문자] 이곳에 유난히 전나무 숲이 우거지게 된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나요? [해설자] 강원도는 전국에서 소나무가 많기로 유명한 지역입니다. 이곳 또한 원래는 소나무로 가득 차 있었죠. 고려 말,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선사가 매일 부처님께 콩비짓국을 공양했는데, 하루는 소나무 가지에 걸려 있던 눈이 떨어지는 바람에 부처님께 공양하려던 국을 쏟고 말았습니다. 나옹선사는 “이놈, 소나무야. 너는 부처님의 진신이 계신 이 산에 살면서 큰 은혜를 입었거늘 어찌하여 부처님의 공양물을 버리게 하느냐!”하고 소나무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산신령이 나타나 “소나무야, 너는 죄를 지었으니 이 산에서 살 자격이 없다. 오늘부터 이 산에는 전나무 아홉 그루가 주인이 되어 산을 번창케 하리라.”라고 하였고, 그 후 오대산에서 소나무가 없어지고 전나무가 번성했다고 전해 온답니다. 지금도 그 아홉 그루 중 두 그루가 일주문 가까이에 우뚝 서서 기품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고인돌 이야기

인천,전라북도,전라남도 강화군,고창군,화순군

고인돌 이야기

인천,전라북도,전라남도 강화군,고창군,화순군

[선생님] “세계에는 무겁고 단단하고 큰 바위들로 석상이나 무덤을 만든 것들이 있습니다. 이집트의 거대한 무덤인 피라미드나, 영국의 신비로운 거석 기념물인 스톤헨지, 이스터섬의 거대한 얼굴 조각상인 모아이상이 대표적이죠. 이런 것을 거석문화라고 합니다.” [학생] “선생님 우리나라에도 거석문화가 있나요?” [선생님] “물론 있습니다.” [학생] “그게 뭔가요?” [선생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거석문화로는 고인돌을 들 수 있습니다.” [학생] “고인돌이 거석문화였군요?” [선생님] “고인돌은 지상이나 지하에 시신을 묻는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큰 돌을 얹은 선사 시대의 무덤이 대부분입니다. 납작한 판석이나 괴석형 덮개돌 밑에 돌을 고여 만든 것이 바로 고인돌인데요, 지석묘라는 말로 부르기도 합니다.” [학생] “선생님 고인돌은 우리나라에만 있진 않죠?” [선생님] “고인돌은 북유럽으로부터 시작하여 서유럽의 영국에서부터 프랑스, 스위스와 이베리아반도를 거쳐 지중해의 북쪽 지방, 중동·인도·동남아시아 등지와 중국의 푸젠성, 저장성, 산둥반도, 요동반도, 길림성 남부, 한반도 전역, 그리고 일본의 규슈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습니다.” [학생] “다 같은 시기에 세워진 건가요?” [선생님] “아닙니다. 고인돌이 세워진 연대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유럽과 아프리카는 기원전 5000년에서 기원전 4000년 전후로, 동아시아는 기원전 2500년에서 기원전 수백 년 전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대체로 청동기 시대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죠.” [남자] 고인돌은 일반적으로 하천유역의 대지와 낮은 구릉에 많이 축조되었습니다. 고인돌은 넓은 평야 지대보다는 산과 구릉이 가까운 약간 높은 평지와 해안지대 등지에 많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하천 유역에는 주로 하천이 흘러가는 방향과 일치하게 배치되었는데 당시 인간의 생활 주거지가 주로 그러한 지대에서 발달했기 때문입니다. 넓은 평야 지대에 고인돌이 없는 이유는 그곳이 대부분 개발되기 이전이었고 인간 생활에 이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대지 혹은 약간 높은 구릉 지대는 양지바른 산기슭으로 생활에 필요한 물과 땔감 등을 구하기 편리했고, 사냥터도 가까웠기 때문에 이러한 곳에 주거지와 경작지 그리고 묘지를 조성했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접근성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여자] 민간에서는 고인돌을 자연석이 땅에 묻혀있다고 하여 독배기, 바우배기, 독바우로, 받침돌이 있는 바둑판식 고인돌의 경우 관바우, 암닭바우, 덮개돌의 형상에 따라 배바우, 거북바우, 두꺼비바우, 개구리바우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민간신앙과 연관 지어 고인돌의 배치상에서 칠성바우, 옛날 장군이 돌을 옮기다가 말았다는 장군바우 등으로도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마을 이름이 고인돌과 관련이 되어 있기도 한데 배바위를 닮은 주암, 거북바위의 구암, 칠성바위를 뜻하는 칠암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경희궁지

서울 종로구

경희궁지

서울 종로구

지금의 서울역사박물관 뒤쪽으로 오면, 밤에도 명패의 광채가 주변을 밝힌다던 ‘야주개(夜照峴) 대궐’, 경희궁이 있습니다. 지금은 몇 채의 건물만 복원되어 유지되고 있는 경희궁은, 우리에게 이미 잊혀진 궁궐이지만, 조선왕조의 여러 왕이 태어나고 생을 마감했던 중요한 이궁이었습니다. 경희궁의 원래 이름은 서궁, 서궐, 경덕궁(慶德宮) 이었는데요, 조선 영조대에 이르러 ‘경희궁(慶熙宮)’으로 고쳐 부르게 됩니다. 처음 지어진 것은 조선 광해군 때의 일로, 자신의 친척인 정원군(定遠君)의 옛 집에 왕의 기운이 서려있다는 말을 듣고, 그 집을 헐고 궁을 세운 것이 바로 경덕궁, 지금의 경희궁입니다. 정원군의 집터를 이용해 만들었지만, 광해군은 실제 이 궁을 사용해보지도 못했고, 인조반정이 일어나 새로운 왕인 인조가 즉위하게 됩니다. 중요한 사실은, 인조가 바로 정원군의 첫째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인조가 즉위했을 때, 창덕궁과 창경궁이 모두 불 타 버렸기 때문에, 이 곳에서 주로 생활하고, 나라를 돌보았다고 합니다. 흥화문은 원래 경희궁 동쪽에 있는 문인데, 지금의 구세군회관 빌딩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일제강점기에 경희궁이 헐리면서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되는 수난을 겪게 됩니다. 해방 이후에는 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면서 원래의 역할을 잃게 되지만, 1988년 현재의 위치로 다시 이전하여 복원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곳을 ‘경희궁지’로 부르게 된 이유도, 일제강점기에 경희궁에 있던 대부분의 전각이 헐리고, 곳곳으로 팔려나가 찾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경성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세워 오랜 기간 학교로 사용되었습니다. 1988년부터 경희궁지에 대한 복원이 시작되어 일부 건물들만이 복원되었고, 지금 우리와 만나고 있습니다. 특별한 곳이었던 만큼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지, 들어가 볼까요?

서대문 형무소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 형무소

서울 서대문구

서울 한복판에 빨간 벽돌로 지어진 감옥이 있습니다. 바로 대한독립운동의 성지이자 민주화 투사들이 투옥되었던 서대문 형무소 입니다. 서울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5번 출구로 나오면 서대문형무소의 정문이 보입니다.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출소 장면을 찍을 때 단골로 등장한 장소인데요, 대한제국 시기에는 의병들이 목숨을 잃었던 장소이고,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의 의지를 꺾지 않은 숭고한 장소이자, 근현대사에서는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많은 민주화 열사들이 수감되었던 장소입니다. 1907년,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 당하고, 정미7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이에 반발하여 전국에서 의병들이 봉기하여 일본군과 싸우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사로잡힌 의병들을 감옥에 수감되는데, 잡혀오는 의병들이 늘어나면서, 일본은 새로운 감옥을 만들겠다는 계획하에 1908년 경성감옥을 만듭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1912년까지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이후 서대문 감옥을 거쳐 서대문 형무소가 됩니다. 1920년대부터 지금과 비슷한 형태가 되었고, 수감되었던 재소자들을 강제 동원하여 지었다고 합니다. 입구에서 볼 수 있는 망루는 수감자를 감시하고 탈옥을 막는 용도로 지은 것입니다. 자, 이제 정문입구로 들어가서 표를 구매하면, 본격적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관람이 시작됩니다. 의미가 있는 숭고한 장소이기 때문에, 조용한 관람 부탁드립니다.

윤동주 하숙집터

서울 종로구

윤동주 하숙집터

서울 종로구

이 가이드는 김영하님의 목소리로 녹음 되었습니다. 박노수 미술관에서 수성동 계곡으로 올라가는 골목길, 윤동주 시인이 하숙했다고 알려진 장소가 있습니다. 지금은 일반 가정집으로 바뀌고, 기둥에 붙은 팻말만이 그 흔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북간도 출신으로,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1938년부터 1942년까지 약4년 동안 서울(당시 경성)에 머무릅니다. 원래는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지만, 3학년 때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정병욱이란 후배와 함께 하숙생활을 시작합니다. 정병욱의 회고록에는 이 시기에 윤동주와 하숙 했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윤동주와 정병욱은 기숙사에서 나와 하숙할 집을 찾고 있었습니다. 마침, 하숙생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어 직접 찾아갔는데, 그 집이 평소에 존경하던 작가 김송의 집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집에서 하숙하기로 결정했고, 머무르는 동안 윤동주는 아침 일찍 인왕산에 올라 사색을 하기도 하고, 흐르는 계곡물 아무데서나 세수를 했다고 합니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집 주인 김송과 문학적인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이 집의 주인인 김송은 함경도 출신의 항일작가였는데, 일본 경찰의 ‘요시찰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거의 매일 저녁마다 형사가 찾아와 집안을 뒤지고, 윤동주가 읽는 책의 제목을 모두 적어갔습니다. 어떤 날은 모든 짐을 검사해 편지를 뺏어가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집주인인 김송은 이런 부분을 미안하게 생각했고, 윤동주와 정병욱은 안전을 위해 가을학기가 시작될 쯤, 새로운 하숙집으로 이사했습니다. 윤동주가 옮긴 집은 북아현동이었는데, 이 곳에는 또 한 명의 유명문인인 정지용 시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윤동주의 고종사촌인 송몽규도 같은 동네에 머무르고 있어서, 유학 전까지 북아현동에서 머무르게 됩니다. 김송의 하숙집에서 머무르는 동안, 윤동주는 <또 다른 고향>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시의 내용은 실제 자신의 경험과 시대적으로 힘든 현실을 반영한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다른 고향>을 읊으면서, 윤동주가 오고 갔을 골목길을 산책해보시기 바랍니다.

박노수 미술관

서울 종로구

박노수 미술관

서울 종로구

이 가이드는 김영하님의 목소리로 녹음 되었습니다. 한국 동양화의 거장으로 평가 받는 남정 박노수 화백은 1973년, 옥인동의 한 집으로 이사를 오게 됩니다. 프랑스양식의 외관을 가진 이 집은 아름다운 정원과 독특한 내부로 화가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 집의 외관은 프랑스식, 내부는 일본식과 한국식, 중국식 건축기술이 모두 들어간 독특한 양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원래 주인은 바로 친일파 윤덕영의 딸입니다. 윤덕영은 딸을 매우 아꼈는데, 가장 좋은 집을 주고 싶은 마음에 당대 최고의 건축가 박길룡에게 설계를 맡겨 집을 완성합니다. 기와집과 초가집 사이에서 2층의 양옥집은 눈에 띄었습니다. 윤덕영의 서양식 저택인 벽수산장이 화재로 소실된 후에는 더 두드러져 보였다고 합니다. 광복 후 친일파의 재산이 모두 환수되면서, 이 집의 주인은 계속 바뀌다가 결국 박노수 화백의 가족이 살게 되었습니다. 박노수 화백은 이 집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이후 종로구에서 집을 매입해 2013년부터 일반에 공개되고 있습니다. 박노수 미술관은 화백의 그림과 생전에 모은 수집품, 직접 사용하던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시 내용은 매년 바뀌지만, 박노수 화백이 사용하던 유품, 수석들은 복도와 정원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박노수 화백은 수석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는데, 돌 하나에 자연의 모든 모습이 담겨 있어, 그림의 영감을 받는 원천이라 했습니다. 박노수 미술관의 내부는 촬영이 불가능 합니다. 대신, 외부와 정원은 촬영이 가능합니다. 80년이 넘은 오래된 집이기 때문에, 내부를 둘러볼 때 마룻바닥이 삐걱이는 소리가 나고, 계단도 조심조심 올라가야 합니다. 하지만 세월만이 줄 수 있는 소리와 분위기는 이 집의 신비로움을 더해줍니다. 이 곳에 와본 사람들이 극찬한다는 정원은 집을 둘러싼 작은 규모이지만, 수석과 잘 관리된 나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선과 여백, 구도를 잘 구현해냈던 박노수 화백의 그림과 그에게 영감을 주던 자연은 정원에서 표현되어 있지요. 찬찬히 둘러보면서 주인을 닮아간다는 집의 모습을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통인시장

서울 종로구

통인시장

서울 종로구

이 가이드는 김영하님의 목소리로 녹음 되었습니다. 통인동의 골목 안쪽, 동네 살림을 책임지는 통인시장이 있습니다. 통인시장이 언제부터 이 골목에 자리잡았는지는 생각보다 쉽게 알 수 있는데, 이 시장에서 대대로 장사해온 분들이,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대, 서울은 그야말로 아수라장, 아비규환이었습니다. 폭격과 군인들이 지나간 자리는 초토화 되었지만, 경복궁과 중앙청 등 큰 건물들이 있었던 종로일대는 민가들이 일부 살아 남았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사람들, 휴전선이 생기면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 가족의 생사를 들을 수 있을까 해서 서울에 남은 사람들이 이 곳에 정착했습니다. 사람이 몰리자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를 사고 팔았고, 한 골목에 모이면서 통인동에 있는 ‘통인시장’이 되었습니다. 통인시장에서는 맛있는 음식도 팔고, 튼튼한 물건도 팔았지만, 무엇보다 ‘소식’을 주고받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전쟁 때 헤어진 가족의 생사, 남겨두고 온 가족의 생사. 시장을 오고 가는 많은 사람들은 고향 생각나는 음식 앞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모두의 소식이 통하는 시장이 되었습니다. 경복궁 옆 동네, 청와대에서 가까운 동네가 되면서 이 곳은 개발제한 구역이 되었습니다. 어느날부터 동네에 사람들이 떠나고, 시장을 누비던 상인들도 하나 둘 떠나며 빈 가게도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시장을 지키고 싶었던 상인들은 고객을 다시 불러오기 위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경복궁 옆에 있다는 장점을 살려서, 조선시대 시장처럼 엽전으로 사용하는 것이지요. 엽전으로 시장 안에 있는 가게에서 음식을 사서, 도시락에 가득 담으면 골라먹는 재미가 있는 한 끼 식사가 완성되는 겁니다. 통인시장 중간에 있는 ‘엽전 도시락 카페’에 가면 현금을 엽전과 도시락 식판으로바꿔줍니다. 식판을 들고 시장을 누비다 보면 기름떡볶이, 닭강정, 김치, 샐러드까지 식판 가득 담아와서 먹을 수 있습니다. 맛도 가득 담아 먹고, 엽전으로 조선시대 체험도 해 볼 수 있는 문화와 맛이 공존하는 통인시장입니다.

이상의 집

서울 종로구

이상의 집

서울 종로구

이 가이드는 김영하님의 목소리로 녹음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독특한 문학세계로 유명했던 문학가 이상은 어린 시절 큰아버지에게 입양돼 통인동 토박이로 자랍니다. 그의 큰아버지의 집은 원래 거대한 한옥이었는데, 나중에 이상이 물려받았고, 사업에 실패하자 집을 팔게 됩니다. 팔린 집은 5개의 땅으로 나뉘어서 계속 주인이 바뀌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현재 이상의 집이 있는 곳은 그 5개의 땅 중 하나입니다.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으로, 3살 때 이 집에 양자로 들어왔습니다. 그의 큰아버지는 아들이 없어서 이상을 입양했는데, 재혼한 큰어머니도 이상에게 애정이 없었습니다. 이상은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특별히 재능을 보였지만, 큰아버지는 돈을 벌 수 있는 건축기사로서의 길을 강요했습니다. 결국 이상은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진학해 건축기사가 됩니다.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사로 취업한 이상은 필명을 사용해서 글을 썼는데, 주로 자신의 정체성 혼란과 시대적인 혼란을 문학작품으로 풀어냈습니다. 그의 필명인 ‘이상(李箱)’도 한글로 읽을 때 여러 가지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천재적인 재능을 갖춘 사람의 좌절과 소망을 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난해한 문학세계와 고뇌하는 이미지로 각인된 이상이지만, 자신의 진짜 가족에게는 효도하는 아들이자 든든한 큰오빠였다고 합니다. 여동생의 증언에 의하면, “큰오빠는 어머니에게 늘 공손했고, 뭘 못해드려서 애태우곤 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상은 여동생을 “나의 유일한 이해자”라고 하며 아꼈다고 합니다. 이 집은 이상의 어린 시절의 어둠과 희망을 품고 있는 공간입니다. 전시실 제일 안쪽, 어두운 공간에서 그의 일생을 담은 작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지요. 계단의 끝에 무거운 미닫이 문을 열면, 이상의 집 마당과 지붕이 보입니다. 자유로의 출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한 문학가의 집에서, 이상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홍건익 가옥

서울 종로구

홍건익 가옥

서울 종로구

이 가이드는 김영하님의 목소리로 녹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중인들이 모여 살던 서촌은 다양한 시대를 대표하는 한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그 중 ‘홍건익 가옥’으로 불리는 이 집은, 1930년대에 지어진 근대 한옥입니다. 홍건익에 대해서는 남은 자료가 거의 없지만, 이전에 있던 집을 헐고, 지금의 집을 지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붙었습니다. 홍건익이 살기 전. 이 곳에는 고영주라는 역관과 그의 가족들이 살았다고 합니다. 고영주의 집안은 아버지, 형제, 조카 3대가 역관으로 활동했습니다. ‘역관’은 지금의 통역사, 외교관과 같은 역할을 하는데, 외국인을 직접 만나 교류할 수 있었고, 다양한 문화와 새로운 정보를 빠르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인이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부와 명예를 가질 수 있었던 직업이었습니다. 고영주는 중국어(한학)를 배워 활동한 역관이었습니다. 역관으로 더 유명한 건 그의 형제들인데, 둘째 동생인 고영희는 일본어 역관으로,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의 일원이었습니다. 막내인 고영철은 중국에서 영어를 배운 후 미국에 보빙사(사절단)로 갔습니다. 고영주는 1910년대에 이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고, 시간이 지나 홍건익이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홍건익이 집을 지었을 때는 더 큰 규모였지만, 지금은 절반만 남았습니다. 홍건익 가옥의 일각문으로 들어가면, 집 주인의 취향과 감각이 보입니다. 문간채와 사랑채는 깔끔하게 단장한 느낌이라면, 안채는 좀 더 편안한 느낌입니다. 안채 대청마루 아래쪽에는 태극기에도 쓰이는 팔괘 모양의 구멍이 있는데, 구멍을 뚫어 바람이 통하게 하는 기능적인 면도 있습니다. 근대 한옥답게 문이나 창이 유리로 되어 있는데, 집안의 부를 드러내는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안채 왼쪽으로 가면 별채와 정원으로 가는 작은 문이 나옵니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것은 큰 우물인데, 당시에 개인의 집 안에 우물을 만들 정도면 엄청난 부자였다고 합니다. 별채는 작은 도서관으로 사용 중인데,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읽고 싶은 책을 골라 방석에 앉으면 정원의 풍경도 보이고 책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집의 전경을 보고 싶다면, 정원 꼭대기로 올라가면 됩니다. 별채, 안채, 사랑채, 문간채의 지붕들이 이어져 현재의 서촌 건물들과 어우러지는 풍경이 아름답지요. 정원 벤치에 앉아서 이 소담한 풍경을 느긋하게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인왕산

서울 종로구

인왕산

서울 종로구

이 가이드는 김영하님의 목소리로 녹음 되었습니다. 경복궁의 서쪽에 있는 인왕산은 풍수지리적으로 ‘우백호(右白虎)’의 위치여서, 경복궁을 수호하는 명산이라 불립니다. 고려시대에 이 곳에 ‘인왕사(仁王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인왕산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우백호라는 역할에 맞게, 인왕산에는 실제 호랑이가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호랑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고려시대 강감찬 장군이 인왕산을 순찰하다가 어떤 노스님을 만났는데, 스님에게 당장 이곳을 떠나라며 호통을 쳤습니다. 호랑이의 우두머리가 둔갑해서 노스님 흉내를 내던 것을 장군이 꿰뚫어 본 것입니다. 둔갑했던 호랑이는 장군의 꾸짖음에 자기 무리들을 이끌고 인왕산을 떠났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인왕산에 대한 내용은 대부분 ‘호랑이가 내려왔다’는 기록입니다. 인왕산에서 내려온 호랑이가 궁궐은 물론, 민가에 피해를 입히는 일이 자꾸 일어나자, 세조는 세 번이나 호랑이 사냥을 나가기도 했습니다. 인왕산의 호랑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속담은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 있나’인데, 어떤 일을 세상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호랑이들 사이에서 인왕산을 모르면 호랑이 대접을 못 받았다는 건데, 그만큼 인왕산에 호랑이가 많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왕산은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뤄진 바위산입니다. 그만큼 산세가 험하고, 기묘한 바위들이 많은데, 이름만 쭉 나열해 보면 돼지, 두꺼비, 코끼리, 달팽이, 호랑이, 삿갓, 해골, 치마, 부처님 등 동물, 사물, 신까지 바위 모양마다 각자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인왕산은 1968년부터 1993년까지 일반인이 갈 수 없는 산이었습니다. 청와대의 안보와 관련하여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했던 것입니다. 1993년 2월부터 전면 개방되어 지금은 등산장비를 갖춘 누구나 올라갈 수 있습니다. 가볍게 산을 구경하고 싶다면, 수성동부터 청운동까지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됩니다.

수성동 계곡

서울 종로구

수성동 계곡

서울 종로구

이 가이드는 김영하님의 목소리로 녹음 되었습니다. 인왕산에서 흘러나온 물줄기는 계곡을 이루었고, 한가롭고 그윽하며 물소리가 크다 하여 ‘수성동(水聲洞)’이 되었습니다. 수성동 계곡을 통해 흘러나온 물은 경복궁을 지나 동쪽의 혜정교까지 이어지고, 청계천과 만납니다. 때문에 경복궁의 풍수지리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장소입니다. 인왕산은 바위산이어서, 원래 산세가 험하고 나무가 많지 않습니다. 때문에 거대한 바위들과 드문드문 자리한 나무 사이로 계곡이 발달했지요. 조선초기에 이 풍경을 사랑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입니다. 안평대군은 조선 시대 선비가 갖춰야 할 재주인 시∙서∙화를 모두 잘하는 왕자였습니다. 안평대군이 수성동에 집을 짓고 경복궁에 입궐하자, 세종이 ‘게으름 없이 임금 한 분만을 섬겨라’는 의미로 ‘비해당(匪懈堂)’이라는 당호를 내립니다. <<운영전>>이라는 조선시대 소설을 보면, 인왕산 기슭에 있었다는 ‘수성궁(水聲宮)’이 나오는데, 수성궁의 주인이 안평대군입니다. 소설에서 안평대군은 역시 시∙서∙화에 능한 풍류를 즐기는 사람으로 나오는데, 실제 그의 성품과 닮아있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안평대군은 비해당을 정말 좋아했는데, ‘비해당48영(匪懈堂 48詠)’이라는 시를 지어 그 풍경을 즐겼다고 합니다. 안평대군의 수성궁이 사라진 조선 중기, 이 곳에 또 한 명의 천재화가가 방문하는데, 진경산수로 유명한 대가 겸재 정선입니다. 진경산수화는 우리나라의 실제 산수를 보고 그린 풍경화로, 겸재 정선은 이 진경산수의 새로운 경지를 연 화가입니다. 정선은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에 있는 청운동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하는데, 41세때 관상감(조선시대에 날씨와 하늘을 관측하는 부서)의 천문학교수로 첫 관직에 진출했습니다. 매우 늦은 나이에 관직에 진출 하다 보니, 경상도 청하 현감이 되었을 때는 58세였고, 81세에는 종2품의 동지중추부사(나이 많은 벼슬아치를 우대하기 위한 자리)가 됩니다. 52세 때부터 인왕산 동쪽 기슭의 인왕곡에 살았다고 전해지는데, 이 곳에 머무르면서 인왕산의 풍경을 담은 인왕제색도, 수성동 등의 작품을 그렸습니다. 특히 수성동이라는 작품에는 지금의 수성동 계곡과 비슷한 풍경이 보이는데, 돌다리인 ‘기린교(麒麟橋)’가 나와 있어 그림의 구도와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도 제주시

국립제주박물관

제주도 제주시

제주역사와 문화의 전당 국립제주박물관 화산섬만의 독특한 지형과 섬 문화. 제주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곳, 국립제주박물관. 먼 옛날 제주의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 시간여행을 함께 떠나봅니다. 제주의 전통 초가모습을 형상화한 국립제주박물관. 제주만의 독특한 섬 문화와 역사에 관한 다양한 자료와 7천 여 점의 유물들을 만날 수 있는 제주의 역사박물관입니다. 국립제주박물관은 선사실, 탐라실, 고려실, 탐라순력도실, 조선실, 기증실 등 여섯 개의 전시관으로 이뤄져있는데요~ 제주의 탄생과 첫 제주인의 정착과정, 구석기시대부터 탐라국이 탄생하기 전까지의 문화발전상을 볼 수 있는 선사실. 탐라국의 탄생과 주변국들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탐라실. 300년 전 제주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탐라순력도실에서는 조선 숙종 때 제주에 부임해온 이형상 목사가 각 고을을 순시하는 모습을 그린 보물 제652-6호 탐라순력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표류인들과 유배인들의 기록과 유품도 볼거린데요,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가다 풍랑을 만나 오키나와 등에 표착했던 사실을 기록한 장한철의 <표해록>과 <하멜 표류기>의 복사본, 충암 김정, 우암 송시열, 추사 김정희, 면암 최익현 등 제주유배시절, 이들의 행적과 유품을 전시한 코너도 흥미를 끕니다. 제주 해녀들의 옷과 도구, 제주의 무속 신앙과 유물까지 둘러보고 나면 박물관을 한 바퀴 둘러보게 되는데요, 여기서 끝이 아니라, 체험관 어린이 올레에서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역사체험과, 상설체험코너에서는 문화재 탁본과 목판인쇄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밖에도 상설 전시와 함께 제주의 지역 색을 살린 다양한 기획전과 특별전, 문화강좌, 체험행사, 공연 등을 열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제주의 역사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다양한 자료와 알차고 유익한 문화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국립제주박물관. 제주를 느끼고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역사박물관입니다.

궁남지

충청남도 부여군

궁남지

충청남도 부여군

백제의 별궁 연못, 궁남지 [서동요]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시집가 놓고 서동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맺어질 수 없는 운명도 거역한 사랑!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모두 다 아시죠? 바로, 이곳이 그 서동왕자인 백제 무왕이 만든 연못이에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 궁남지랍니다. 옛날, 이 연못 옆에는 아름다운 별궁이 있었어요. 백제 무왕은 아름다운 이 연못을 왜 만들었을까요? 사랑하는 왕비를 위해서? 이제부터 저와 함께 그 비밀의 열쇠를 찾아볼까요? 옛날 중국 사람들은 동해바다에 신선들이 사는 신비의 섬이 있었다고 믿었죠. 그래서 연못을 만들 때 섬을 꾸며 불로장생을 빌었다고 해요. 이 궁남지도 그런 도교적 영향을 받아 물 속에 섬을 쌓아 방장선산을 만들었다고 기록에도 나와 있답니다. 그 당시 백제 상류사회에 도교가 유행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하죠. 하지만 이 궁남지는 단순히 풍류적 장소로만 볼 순 없어요. 현재 남은 유적을 살펴볼 때 자연의 지형을 그대로 살린 이 연못은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은 적을 막기 위한 외호의 역할을 한 것으로도 추측되어진답니다. 백성의 안위를 지키려는 왕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 바로 이 연못을 만든 진짜 이유일 겁니다. 이 아름다운 궁남지를 만든 백제의 조경기술은 일본에 건너가 일본 조경기술의 원류가 되었다는 사실은 일본 역사서에도 나와 있어요. 백성을 사랑하는 무왕과 선화 공주의 아름다운 사랑처럼 새롭게 재현된 이 궁남지에서 새로운 사랑의 전설을 만드는 주인공이 되어보지 않을래요? 궁남지 설화 [해설] 이곳 궁남지에는 신비로운 설화 하나가 전해지고 있어요. 바로 백제 무왕의 탄생 설화인데요. 여러분께 소개해 드릴게요. 이곳 궁남지 근처에 마음씨 곱고 아름다운 여인이 살고 있었는데요. 어! 저기. 왕비님이 누굴 찾고 있는 것 같아요. 아! 무왕을 찾고 계셨구나. 두 분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살짝 들어볼까요? [왕비] 폐하, 여기 계셨군요. 또 어머님이 보고 싶으세요? [왕] 왕비구려. 그런데 내가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았소? [왕비] 어머님이 보고 싶으실 때마다 여기 오시잖아요. 오늘은 꼭 어머님 얘기를 듣고 싶어요. [왕] 옛날 이곳은 마밭이 많아서 ‘마래방죽’이라고 불렀는데, 마음씨 곱고 아름다우셨던 어머님이 바로 이 근처에서 사셨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버드나무 숲 사이로 바람이 불 때면, 밤마다 한 젊은이가 어머님을 찾아왔어요. 범상치 않은 젊은이를 사랑하게 된 어머니는 젊은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시지 못하셨지요. [왕비] 왜 물어보시지 못하셨을까요? [왕] 글쎄요. 하지만 너무도 궁금한 나머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하셨지요. [왕비] 어떤 방법이요? [왕] 그 젊은이 모르게 옷에 실을 꿰놓았답니다. 함께 밤을 지내고 젊은이가 떠난 후에 그 실을 따라가 보니, 글쎄 용의 몸에 실이 묶여 있는 게 아니겠소. 바로 그 젊은이가 연못 속에 사는 용이었답니다. 그날 이후 어머니의 몸에는 태기가 보였고 그래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나 서동이요. [왕비] 그럼 폐하가 용의 아들인가요? 제가 그럼 용의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거네요? [왕] 하하하 그렇지. 왕비도 사람이 아닌 용과 함께 살고 있는 거지. 하하하. [해설] 백제 무왕의 탄생설화는 용으로 비유된 왕과 평범한 여인 사이에 태어난 비범한 왕의 탄생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왕의 권위와 백제 부흥의 염원이 담겨져 있는 특별한 이야기랍니다.

이타미 코스 - 본태박물관

제주도 서귀포시

이타미 코스 - 본태박물관

제주도 서귀포시

본태박물관은 2012년 11월에 개관한 안도 다다오의 작품입니다. 안도 다다오는 건축계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일본의 명장으로 주변환경과 조화를 고려하는 건축 철학이 유명합니다. ‘본태’는 ‘본래 모습을 탐구하고자 하는 취지’라는 의미를 담고, 제주도 대지에 순응하는 전통과 현대라는 컨셉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안도 다다오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노출 콘크리트와 한국적 정서가 담긴 기와, 전통 돌담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박물관에는 5개의 전시관, 조각공원, 본태카페가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미로와 같은 구성을 가지고 있어서 제 1 전시관을 갈 때는 물 위를 걷게 되고, 제 2전시관은 물 아래로 걷도록 하는 등 내부 동선이 흥미롭습니다. 전시실에서는 쿠사마 야요이부터 백남준까지 현대미술의 대가들을 만날 수 있으며 제1전시관에는 민속공예 컬렉션이 풍부한 것도 특징입니다. 2층 높이의 깊은 처마 아래로 넓은 홀과 주 전시실을 연결하는 개방적 장소가 있고, 큰 창을 통해 제주 앞바다와 주변을 조망할 수 있으니 공간을 즐기며 제주의 풍경도 감상해 보세요.

이타미 코스 - 방주교회

제주도 서귀포시

이타미 코스 - 방주교회

제주도 서귀포시

방주교회는 성서 속 노아의 방주(方舟)를 형상화한 이타미 준 말기의 작품 중 하나입니다. 400m의 오름 위에 연못을 만들고 방주를 띄운 것은 화가이기도 했던 이타미 준의 회화적 상상력이 잘 나타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재는 실제 성경에 나오는 물, 빛, 나무, 금속 자재를 이용하여 건축가가 추구하는 자연과의 조화를 보여주었습니다. 살짝 꺾인 지붕선이 매력적인데요, 지붕을 덮은 금속판이 세공을 해 놓은 보석처럼 빛에 따라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보입니다. 이처럼 하늘을 향한 지붕과 땅을 향한 수공간이 어우러져 바람이 불어 수조에 물결이 생기면 마치 물위에 뜬 커다란 배가 노를 펼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내부는 나무 벽 사이로 좁은 창이 일정하게 배치되어 있어 자연 빛으로 스트라이프 무늬가 생깁니다. 그리고 예배실로 들어가기 전, 지붕이 꺾이는 지점에는 내부에 하늘을 향해 작은 창이 있습니다. 이것은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 나오는 창인데요, 대홍수가 끝난 후 노아가 땅이 말랐는지 확인하기 위해 비둘기를 날려 보냈다는 성경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방주교회는 2002년 김수근 문화상 건축 본상을, 2010년에는 한국건축가협회 대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이타미 코스 - 포도호텔

제주도 서귀포시

이타미 코스 - 포도호텔

제주도 서귀포시

포도호텔은 이타미 준이 설계한 대표적인 건축물로 핀크스 골프장 내에 위치한 26실의 작은 호텔입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 마치 한 송이 포도 같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제주의 자연과 한국적인 미를 바탕으로 제주의 오름, 전통 초가집을 모티브로 설계되었습니다. 이 호텔은 유난히 사람을 느긋하게 만드는 안락함이 있는데요, 측면으로 들어가 안으로 긴 복도가 이어져 골목길을 걷는 느낌이 든다거나, 단층 호텔로 천장이 다른 호텔보다 높고, 인공조명보다는 자연광이 잘 들어올 수 있도록 설계된 점 등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듭니다. 지붕은 티타늄 아연판으로 만들어졌는데, 이질적인 인공소재를 둥근 지붕 형태와 어울리도록 디테일을 살린 것이 이타미준 건축의 묘미입니다. 객실은 바다가 보이는 쪽은 서양식, 산이 보이는 쪽은 한식 온돌로 구성하였고, 한실에서는 편백나무로 만든 욕조에서 온천욕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호텔 곳곳에 서까래와 격자무늬 창 등 한국 전통문양이 어우러져 있고 티타늄으로 설계된 호텔 지붕은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포도호텔은 제주시 아름다운 건축물 선정, 제 2회 아시아 주거문화 주거경관상 수상, 2003년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슈발리에 수상 등 화려한 수상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